국내 최대 공기업 한국전력과 산하 공기업들의 신임 CEO가 이른바 '관피아'와 '한피아'로 채워지면서 문재인 정부의 공기업 혁신 공약이 성공할 수 있을 지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피아란 '한국전력'과 '마피아'의 합성어로 한국전력 출신들이 관련 기업이나 기관 요직을 맡는 것을 말한다. 관피아는 '관료'와 '마피아'의 합성어다.
◆정승일 사장, 산업부 차관 시절 '탈원전' 앞장... 한국전력 적자 전락
최근 한국전력 신임 CEO에 취임한 정승일 사장은 한국전력의 감독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차관을 지냈다.
정승일 사장의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근무기간(2018년 9월~2020년 11월)은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탈석탄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던 시기와 겹친다. 이 때문에 한국전력은 이 기간 실적과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2018, 2019년 한국전력은 조(兆) 단위 적자를 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맞추느라 한국전력이 저렴하게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원전 비중을 줄인 반면 발전단가가 높은 LNG(액화천연가스), 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 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리다 보니 빚어진 결과이다. 그렇지만 한국전력은 주요 수입원인 전기요금을 정부 압력에 인상하지 못했다.
이 결과 한국전력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률 3.69%로 30대 상장사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고 올해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때 초우량 공기업이던 한국전력이 조(兆)단위 부채에 시달리는 부실 기업으로 전락한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승일 사장은 한국전력을 규제하다가 한국전력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다"며 "정 사장이 한국전력 입장을 대변해 전기요금 인상 혹은 원가연동제 시행을 과감하게 정부에 요청할지, 아니면 이를 외면하고 설비 투자 같은 대안을 추진할 것인 지에 따라 한국전력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제33회 행정고등고시로 공직에 입문해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한국가스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한전KPS 등 계열사 6곳 CEO, 한국전력 임원으로 채워져
한전의 주력 자회사 한전KPS의 신임 사장에는 김홍연 전 한국전력 본부장이 사실상 확정됐다. 김 내정자는 오는 22일 주주총회를 거쳐 정식 취임할 예정이다. '한국전력 임원으로 정년 퇴임 →한국전력 자회사 CEO 선임'의 '한피아 공식'을 따른 셈이다.
이밖에 최근 CEO에 선임된 김회천 한국남동발전 사장(전 한국전력 경영지원 부사장), 박형덕 한국서부발전 사장(전 한국전력 기획 부사장), 김성암 한국전력기술 사장(전 한국전력 전력그리드 부사장), 최익수 한국원자력연료 사장(전 한국전력 본부장), 김장현 한전KDN 사장(전 한국전력 ICT사업본부장)도 동일한 패턴을 밟았다. 최근 연임에 성공한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를 지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지역난방공사·석탄공사 CEO 임기 만료 눈앞
하반기 예정인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신임 공기업과 기관 CEO 선출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용성 에너지경제연구원장, 황창화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 유정배 대한석탄공사 사장의 임기만료 시기는 각각 7, 10, 9월이다.
이들 CEO는 교체 가능성이 높다. 올해는 문재인 정부 5년차로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여서 '챙겨야 할 인사'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공기업과 기관의 실적이 저조하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지난해 매출액 272억원, 영업손실은 20억원, 당기순손실 16억원을 기록했다. 대한석탄공사는 지난해 매출액 401억원, 영업손실 931억원, 당기순손실 1147억원을 공시했다. 이에 정치권 인사들과 유관 기관 전·현직 관료들의 물밑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황창화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은 임채정 국회의원 정책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해 이해찬 국무총리 정무2비서관, 한명숙 국무총리 정무수석, 국회도서관장 등을 역임했다. 2016년 제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노원병에 출마했으나 안철수 후보에 패했고, 2018년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양보했다. 당시 황창화 사장이 공기업 사장 자리를 약속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관피아, 한피아를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해당 분야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전문성을 발휘해 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관피아 CEO', '한피아 CEO'는 속사정을 너무 잘 알기에 이해관계에 얽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00년 초 한국전력의 독점을 막기위해 판매와 발전 분야를 분배해 전력산업구조를 개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발전 공기업들은 여전히 한국전력과 정부가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며 "정부가 한국전력의 최대주주이고 사장 임명권도 최종적으로 청와대에 있는 한 사정이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