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 김호겸 기자
현재 각국 도로를 달리고 있는 주력 자동차는 석유(oil)를 잔뜩 싣고 이를 동력원으로 구동하는 내연기관차이다. 석유를 동력으로 변환시키려다 보니 내연기관차에는 엔진, 냉각·흡배기 장치를 포함한 2만여가지 부품이 들어간다.
그런데 전기차 시대가 되면 이들 부품 가운데 3분의 2는 사라질 운명이다. 전기차에는 내연기관차의 엔진과 구동에 관련된 장치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동차 부품사들이 요즘 주식시장에서 디스카운트되고 있는 배경이다. 또, 자율주행차 시대가 도래하면 인간 운전자가 불필요해져 자동차 산업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그런데 HL그룹(회장 정몽원)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면서도 이같은 디스카운트와 리스크에서 벗어나 있다. HL그룹은 외국인과 국민연금이 주요 계열사 지분을 늘려가면서 글로벌 무대에서 'K-모빌리티' 키플레이어로 주목받고 있다. 자율주행차와 전기차 시대에 꼭 필요한 부품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집단 57위... 주력사 HL만도 연평균 성장를 20% 육박
HL그룹은 올해 초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 이하 '공정위')가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일명 대기업집단) 57위를 기록했다. 전년비 한단계 하락했다. 그룹 매출액 6조5940억원, 순이익 1770억원으로 전년비 각각 32.07%, 45.40% 감소했다(이하 K-IFRS 연결). 계열사를 27개에서 13개로 줄인 때문으로 분석된다.
HL그룹의 핵심 계열사는 HL만도이다. 지난해 기준 HL그룹 주요 계열사의 매출액을 살펴보면 HL만도(8조3931억원)가 압도적이다. 공정위가 발표한 HL그룹 전체 매출액(6조5940억원)보다 많은 데 이는 HL만도 계열사 대부분이 해외 법인이어서 국내 법인 회계처리 과정에서 차감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어 HL디앤아이한라(HL D&I HALLA) 1조5720억원, HL클레무브 1조2280억원 순이다.
HL만도 실적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HL만도의 최근 9년(2014~2023) 매출액 연평균증가율(CAGR)은 무려 20%에 육박하고 있다(19.25%). HL홀딩스로부터 분할 설립된 첫해 매출액 1조7214억원이 지난해 8조7805억원으로 5배 점프했다. 대기업 집단에 속해있으면서 매출액 CAGR이 20%에 육박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기업은 사이즈가 커질 수록 움직임이 둔해진다.
HL만도의 3대 주력 생산품은 제동(brake), 조향, 현가(suspension·충격흡수. 일명 '쇼바') 장치로 전기차 시대에도 여전히 필수적으로 쓰인다. 최근에는 자율주행 부품 생산에도 성과를 내고 있다. HL만도는 2019년 12월 자율주행 레벨4 시험 운용에 성공했다. 자율주행 레벨4란 차량 대 차량(V2V), 차량 대 인프라(V2I) 통신을 통해 주행하는 단계로 운전자가 특정 구간에서 운전에 개입할 필요가 없는 수준을 의미한다.
HL만도는 국내 자동차 부품 시장에서 현대모비스, 현대트랜시스, 현대위아, 한온시스템에 이어 '빅5'이고 글로벌 시장에서는 50위에 올라 있다. 매출액의 70% 이상이 북미(미국 포함), 중국, 유럽, 인도 등의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납품비중이 한때 70~80%였지만 40%로 감소했다.
HL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 HL클레무브의 주력 생산품은 자율주행 부품으로 최근 관련 시장이 커지면서 실적이 가파르게 개선되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 1조2280억원을 기록했다. 자율주행 주차로봇 파키(parkie)를 개발하고 있다.
HL디앤아이한라(옛 한라건설)는 중견 건설사이며 아파트 브랜드 '에피트'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2월 700억원 회사채 발행을 위한 수요 예측에서 주문 미달로 인수단 증권사들이 전체 물량을 소화해 자금 조달을 마쳤다. 이어 이달에 추가청약을 통해 600억원 회사채 발행에 성공했다. 고금리(희망밴드 연 7.50~8.50%)를 제시하고 최근 부상하고 있는 월 이자 지급 방식을 더한 덕분이다.
◆낮은 수익성 개선 과제... "고마진 부품 늘려 2025년 영업마진 5% 달성할 것"
HL만도의 현안은 수익성 개선이다. HL만도의 최근 5년(2019~2023) 평균 영업이익률은 1.33%로 아슬아슬하게 이익을 내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HL만도는 고마진 제품 출시를 늘리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수주한 SDC(Smart Damping Control)는 전자식 서스팬션(충격흡수장치)이며 기계식 서스팬션과 달리 고마진 제품군에 속한다. HL만도는 2025년까지 매출액 10조원, 영업이익률 5%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현재 영업이익률(1.33%)을 3~4배 개선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목표가 달성될 경우 HL만도 기업가치도 차원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일 현재 HL만도 외국인 비중은 27.83%에 이른다.
◆'정몽원→HL홀딩스→HL만도' 이어져... 맏사위 이윤행 HL만도 부사장 행보↑
HL그룹의 지배구조는 정몽원 회장→HL홀딩스(25.0%)→HL만도(30.2%)·HL 디앤아이한라(14.2%)·만도 브로제(50.0%)로 이어진다. 정몽원 회장 부친은 고(故) 정인영(1920~2006) HL그룹 창업회장으로 고(故)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창업주 바로 아래 동생이다. 1962년 만도의 전신인 현대양행을 창업해 중공업회사로 키웠다. 하지만 신군부 시절인 1980년 중공업을 정부에서 관리하면서 현대양행 창원기계공장을 뺏겼다. 정 명예회장은 그해 안양공장을 만도기계로 바꿔 자동차부품회사로 다시 일궜다. 만도라는 이름은 ‘전 세계 1만여 도시로 뻗어간다’는 뜻으로 붙여졌다.
그렇지만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해외 자본에 넘어가는 등 곡절을 겪다가 정몽원 회장이 2008년 만도를 다시 찾았다. 2017년 10월에 만도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정몽원 회장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임직원들을 세세하게 챙기는 편으로 알려졌다. HL그룹의 한 직원은 "아이스하키 경기를 관람하러 갔다가 정몽원 회장님이 수많은 관람객 가운데 나를 호명해 놀랐다"고 말했다. 아이스하키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며 HL그룹 아이스하키를 지원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슬하에 지연, 지수 두 딸을 두고 있다. 정지연은 만도 미국 주재원 등으로 근무하며 경영 수업을 받다가 이윤행 HL만도 부사장과 결혼하며 현재 HL그룹에서 퇴사했다. HL홀딩스(1.14%), 로터스프라이빗에쿼티(50.0%) 지분을 갖고 있다. 맏사위 이윤행 HL만도 부사장은 이재성 전 현대중공업 사장 아들이며 최근 HL만도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선임됐다.
차녀 정지수 HL벤처스매니지먼트 상무보는 미국 뉴욕에서 현지 스타트업을 발굴·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정지수 상무보 남편은 강인찬씨로 백지연 전 MBC앵커 외아들이다.
2022년 9월 그룹명을 한라그룹에서 HL그룹으로 변경했지만 일부 계열사들은 '한라'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