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기업 대표들은 대중과 언론 앞에 나서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본인의 스케줄에 기자들을 대동하거나 SNS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총수들의 모습은 현대 비즈니스 세계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철저히 베일에 싸인 채 기업을 이끄는 ‘은둔의 경영자’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베일을 벗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오직 경영 성과로만 자신을 증명한다. 대표적인 인물 중에 대명화학그룹을 이끄는 권오일 회장이 있다. 회사 이름만 들으면 화학 기업 같지만 실상은 국내 패션과 M&A 시장을 뒤흔들며 자산총액 3조원, 매출액 2조원대를 기록하고 최근 대기업집단에까지 진입한 거대한 ‘패션·투자 제국’이다.
회사 직원들 조차도 정체를 모르는 베일 속에 감춰진 재벌 권오일 회장은 어떤 경영자인가.
자료: 공정거래위원회
◇ 권오일 대명화학그룹 회장은…
△서울대 졸업 △회계사 근무 △창업투자회사 KIG홀딩스 인수(2000년대 중반)
◆ 소문만 무성한 ‘M&A 큰손’, 권오일은 누구인가
권 회장에 대해 그나마 알려진 정보들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회계사 출신으로 대명화학의 지분 90.2%를 보유한 최대주주이자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이다. 그는 2000년대 중반 창업투자회사 KIG홀딩스를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6년 필코전자(현 코웰패션), 2008년 모다이노칩, 2010년 모다아울렛을 인수하며 패션 분야에 진출했다. 이 외에 마뗑킴, 코닥어패럴, 말본골프, 디아도라를 비롯한 유망 K-패션 브랜드에 투자하며 ‘M&A 시장의 큰손’이 됐다.
2020년부터는 패션 외의 분야에도 투자했다. 2021년 코웰패션이 로젠택배를 인수하며 물류 사업에 나섰고 2022년 대명화학그룹이 저가항공사(LCC) 에어로케이항공을 인수하며 항공업까지 진출했다. 지난해부터는 뷰티 사업에도 도전하고 있다. 자회사 큐앤드비인터내셔날이 5월 창고형 아울렛 '오프뷰티'를 오픈했다.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점을 시작으로 올해 100기까지 늘릴 계획이다. 이런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대명화학그룹은 현재 49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대기업이 됐다.
다만 500억원 규모 주식매수청구권(풋옵션) 이행 책임을 둘러싼 권오일 회장과 모다이노칩 전 대표 측의 법정 공방에서 권 회장 측 패소로 마무리됐다는 점이 알려지고 있다. 권 회장 측은 매출 목표와 주가 조건을 이유로 풋옵션 이행을 거부했지만, 법원은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조건으로 지급 의무를 피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같은 화려한 이력을 쌓았음에도 권 회장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사내 직원들조차 그의 얼굴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언론 노출을 극도로 피하고 있고 증명사진조차 공개된 적 없다. 삼일회계법인이나 그가 거쳐 간 기업들을 통해서도 신상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수많은 분석 기사와 소문이 무성하지만 시장과 대중 중 그 누구도 권 회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자료: 공정거래위원회
◆ 상장도 거부했다… 무대 뒤에서 증명한 '본질 경영'과 '실질적 성장'
권 회장이 철저하게 숨어서 경영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대외적인 프로모션이나 개인의 명성을 쌓는 것보다 기업의 실질적인 체력을 키우고 내실 있는 성장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는 재무제표가 아닌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 모든 투자 방식은 테스트용 소액 투자, 가능성 확인, 지분 확대, 위임 순으로 이뤄진다. 오로지 브랜드 육성에 집중하기 위해 상장도 하지 않았다. 상장을 하면 매 분기 실적 발표의 압박감에 사로잡혀 브랜드의 성장에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 방식의 성공 사례로는 2021년 인수한 마뗑킴이 있다. 인수 당시 150억원이었던 연매출액이 2024년 1000억원을 넘기고 올해 2000억원을 앞두고 있다.
권 회장의 독특한 행보 덕에 대명화학그룹은 불필요한 언론 노출이나 구설에 휘말려 에너지가 분산되지도 않고 사업의 본질에만 몰두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총수의 카리스마 대신 무대 뒤에서 정교하게 짜인 재무 전략 등 실질적인 액션이 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마뗑킴 매출액, 영업이익률 추이. [자료=더밸류뉴스]
◆ 은둔 경영자들의 귀환, 권 회장도 베일을 벗을까
은둔 경영을 고수하는 인물들이 권 회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이자 글로벌투자책임자(GIO), 정유경 신세계 회장, 쉬양톈 쉬인 창업자가 대표적이다. 이들 모두 각자의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진 GIO는 2017년 네이버 이사회 의장직을 내려놓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AI 경쟁이 심화되며 지난해 3월 복귀했다. 그동안 뒤에서 조용히 경영을 이어갔던 것과 달리 복귀 후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등 언론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 이 GIO 복귀 후 네이버는 지난해 연매출액 12조350억원(+12.1%, 이하 전년동기대비)을 기록했고 2024년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며 82개까지 줄였던 자회사 수도 지난해 95개로 늘었다.
정유경 신세계 회장도 1996년 입사 이후 2016년 12월 신세계백화점 대구점 개점식에 처음 얼굴을 비췄다. 이후로도 계속 조용히 지내다가 2023년 9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 분더샵에서 열린 VIP 파티에 두번째로 얼굴을 비췄다. 정 회장은 언론 노출을 거의 하지 않는 대신 실적을 통해 능력을 입증하고 있다. 신세계는 올해 1분기 연결 총매출액 3조2144억원(+11.7%), 영업이익 1978억원(+49.5%)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왼쪽부터)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정유경 신세계 회장, 쉬양톈 쉬인 창업자. [사진=더밸류뉴스]
해외에는 글로벌 초저가 패션 시장을 장악한 중국 쉬인의 창업자 쉬양톈이 있다. 그는 창업 18년만인 지난 2월 24일(현지시각)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교착 상태에 빠진 기업공개(IPO)를 되살리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은둔을 고수하던 경영자들도 기업 규모가 커지거나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하는 순간에는 언론 앞에 등장했다. 대명화학그룹도 이제 대기업 반열에 올랐고 최근 풋옵션 패소 등 리스크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다른 은둔 경영자들이 그랬듯이 권 회장도 베일을 벗고 대중 앞에 등장하는 날이 올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