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계 빅10' 가운데 가장 눈부시게 비상(飛翔)하고 있는 곳을 꼽자면 한화그룹(회장 김승연)이다. 올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가 발표한 대기업집단(일명 공시대상기업집단)에서 한화그룹은 7위를 기록했다. 10년전(2015년 15위) 대비 8단계 점프했다. 한국의 '재계 빅10'(삼성∙SK∙현대차∙LG∙롯데∙포스코∙한화∙HD현대∙농협∙GS) 가운데 최근 10년 사이에 한화그룹 만큼 순위가 점프한 곳은 없다.
그러다 보니 한화그룹 계열사들도 대부분 해당 산업에서 존재감이 최상위권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솔루션은 각각 방산, 에너지 분야에서 1위(혹은 2위)이고 한화생명∙갤러리아∙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은 각각 생명보험, 백화점, 조선 분야에서 '빅3'이다. 한화손해보험이 존재감이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손보 빅6'(삼성∙DB∙현대해상∙메리츠∙KB∙한화손보)로 분류된다.
◆한화투자증권, 증권업계 순위 꼴찌... 한화 계열사 가운데 사실상 유일
그런데 이 '공식'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가 한화투자증권(대표이사 한두희)이다.
한화그룹의 지배구조와 현황. 단위 억원, %. [자료=공정거래위원회]
한화투자증권은 버핏연구소의 올해 상반기(1~6월) ECM(Equity Capital Market) 조사에서 19위를 기록했다. 쉽게 말해 '꼴찌'를 했다. 한화투자증권보다 위쪽에 상상인증권(11위), iM증권(12위), 한양증권(13위), 유진투자증권(14위), 유안타증권(18위)이 있다.
'한화'라는 두 글자가 가져다주는 브랜드 파워가 증권업계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25 상반기 국내 증권사의 ECM 현황. [자료=버핏연구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한화투자증권의 IB역량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화투자증권이 IB역량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화투자증권은 최근 2년 IPO 주관을 두 건(이에이트, 티이엠씨) 진행했다. 티이엠씨는 한화투자증권 단독 주관으로 2023년 1월 코스닥 상장했고, 이에이트(E8)는 한화투자증권 대표 주관으로 지난해 2월 코스닥 상장했다. 이들 두 곳의 주가는 모두 IPO 이후 반토막 아래로 떨어져 있다.
이에이트의 최근 1년 주가 추이. [자료=네이버 증권]
상장 기업의 주가가 IPO 이후 떨어지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한화투자증권이 주관한 상장사의 주가하락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1일 현재 티이엠씨의 주가(7010원)는 공모가(2만8000원) 대비 4분의 1에 불과하고 이에이트 주가(4160원)는 공모가(2만원) 대비 5분의 1이다.
두 상장사 모두 IPO 당시부터 공모가 산정이 부풀려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화투자증권은 지난해 초 이에이트 IPO를 앞두고 이에이트가 2024년 매출액 164억원, 영업이익 38억원, 당기순이익 30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하고 공모가를 산정했다.
이제 우리는 결과를 안다.
이에이트는 2024년(지난해) 매출액 23억원, 영업손실 106억원, 당기순손실 108억원을 기록했다. 이에이트 이후 한화투자증권은 단 한 건도 IPO 단독 주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성과를 내려다 무리한 것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장병호 CEO 내정자, 김동원 최측근으로 '미션' 부여받아
한화투자증권이 그간 IB 역량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화투자증권은 2023년 말 IB본부를 IB1 부분과 IB2 부문으로 분리하고 IB2부문 산하에 IPO본부를 신설하고 역량 강화에 나섰다. 그렇지만 성과는 앞서 언급한대로 정반대로 나왔다.
한화투자증권의 새 CEO로 장병호 한화생명 부사장이 내정된 것은 이같은 배경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인사는 정기적인 것이 아니다. 한두희 현 대표이사는 올해 2월 재선임됐다가 이번에 갑자기 교체됐다.
장병호 내정자는 한화그룹의 금융 부문을 이끌고 있는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한화생명 경영지원담당 임원으로 근무했고 최근까지 금융비전유닛(unit) 임원으로 금융계열사들의 시너지를 주도했다.
장병호 한화투자증권 대표 내정자
장병호 내정자가 한화투자증권의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궁극적으로 넘어야 할 허들(huddle)은 자기자본 확충일 것이다. 금융업은 자기자본 1원으로 부채 10원을 조달하고 이 부채 10원으로 이런 저런 비즈니스를 수행해 퍼포먼스를 창출한다. 자기자본의 크기가 성과를 내는데 결정적일 수 밖에 없다. 증권사들이 앞다퉈 자기자본 확충에 나서는 이유다.
1분기 기준 한화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2조원에 미치지 못한다(1조7356억원. K-IFRS 별도). 자기자본 5조원이 넘는 증권사가 8곳(미래에셋∙KB∙NH∙한국투자∙삼성∙메리츠∙신한∙하나)인 현실에서 한화투자증권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런데 한화투자증권의 자기자본 확충은 한화그룹의 전략 변화를 전제로 하기에 쉽지 않다. 한화그룹은 에너지(한화솔루션), 방산(한화에어로스페이스), 조선(한화오션)의 3대 축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자원도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계열사 자기자본 확충은 CEO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장병호 내정자는 이같은 난제를 풀어야 한다. 여기에다 경영 혁신도 이뤄내야 한다. 어깨가 무거울 수 밖에 없다. 장병호 내정자가 이같은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느냐에 따라 한화투자증권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