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밸류뉴스는 그간 여러 차례의 분석 기사를 통해 고려아연(회장 최윤범)이 '한국 주식시장의 숨은 진주'에서 '그저 그런 기업'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보도했다. 고려아연이 MBK파트너스∙영풍의 적대적 M&A에 맞서는 과정에서 늘어난 차입금이 고려아연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망은 적중했다.
지난 5일 고려아연은 지난해 4분기 순손실 2251억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이하 K-IFRS 연결). 1974년 고려아연 설립 이래 51년만의 첫 2000억원대 적자 전환이다. 후폭풍은 거셌다. 신용등급에 빨간불(부정적)이 켜졌고 좀체 '하향'을 사용하지 않는 증권가에서도 고려아연 목표주가를 하향하고 나섰다.
그런데 고려아연은 동일한 공시를 놓고 "(영업이익 기준으로는) 100분기 연속흑자 금자탑(金字塔)을 달성했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이번 사안은 고려아연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 회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를 암시한다.
고려아연 단기차입금, 자기자본이익률(ROE) 추이. [자료=고려아연 사업보고서]
◆사상 첫 분기 적자 전환에도 고려아연 "100분기 연속흑자 금자탑" 보도자료 배포
지난 5일 실적 공시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지난해 4분기 매출액 3조4425억원, 영업이익 1328억원, 분기순손실 2251억원을 기록했다. 전년동기대비 매출액은 42.58%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32.93% 감소했고 순손익은 사상 처음으로 적자전환했다.
고려아연이 지난해 4분기 적자전환한 가장 큰 이유는 환율 변동(환차손)과 금융비용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려아연이 지난 한해동안 지출한 금융비용은 2500억원 가량으로 추정된다(구체적인 계정과목을 알 수 있는 고려아연 연간 사업보고서는 다음달 28일께 공시된다). 이는 고려아연의 지난해 1~3분기(1~9월) 금융비용 1849억원과 지난해 10월 신규 조달한 단기차입금 2조7000억원을 반영한 수치다. 전년비 20% 증가했고 전년 연간 순이익의 절반 가량에 해당한다(47.7%). 고려아연 임직원들이 피땀 흘려 창출한 이익의 절반이 금융비용으로 날아간 것이다.
고려아연의 금융비용은 왜 급증했을까?
단기차입금을 늘렸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부채(단기차입금)를 늘리다보니 이자비용(금융비용)이 급증한 것이다. 고려아연의 단기차입금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고려아연의 단기차입금 추이를 살펴보면 2019년까지만 해도 100억~300억원대를 유지하다가 2020년 처음으로 1000억원대에 진입하더니 2955억원(2021)→7916억원(2022)→6192억원(2023)에 이어 지난해 처음으로 조(兆) 단위에 진입했다(1조8433억원).
1조8000억원이다.
이 금액이 얼마나 위험하고 조심해야 할 숫자인지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회계에서의 단기차입금이란 1년 이내에 갚아야 하는 부채이므로 고려아연에는 월평균 1500억원의 '갚아야 할 돈'이 만기도래하고 있는 셈이다. 아래의 고려아연과 피어그룹(peer group∙비교기업)의 단기차입금을 비교한 그래프는 고려아연의 재무 안정성이 어디 지점에 도달했는 지를 웅변하고 있다(K-IFRS 별도).
고려아연과 피어그룹의 단기차입금. 2024 3Q K-IFRS 별도. 단위 억원. [자료=금융감독원 전자공시]
고려아연은 다음달 말에 최대 7000억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려다 금융당국의 권고로 주주총회 이후로 연기했다. 회사채를 발행하려는 이유는 기존의 단기차입금에 비해 회사채 금리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채 조달비용도 예전처럼 고려아연에 우호적이지 않다. 신용평가사에서 고려아연의 신용등급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한국신용평가는 고려아연의 무보증사채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변경했다. 고려아연이 자사주 취득자금을 외부 차입으로 조달해 순차입금, 금융비용, 부채비율이 나빠졌다는 이유 때문이다.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조달비용은 증가한다.
◆고려아연 단기차입금 100억→1.8조 100배↑
부채는 무서운 것이다. 유능한 경영자는 부채가 정말이지 조심해야 할 계정 과목(account name)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한국 재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 시절 영광을 누리다 무너진 기업들은 대부분 부채를 과다하게 끌어다 썼기 때문임을 확인하게 된다. 가깝게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그랬고 멀리는 해태∙진로∙국제그룹이 그랬다.
기업이 이런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를 판단해볼 수 있는 시그널이 있다. 위기를 글자 그대로 위기로 받아들이고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기업은 살아남는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그랬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했다. 대우건설 인수자금 6조4000억원의 70%를 외부 자금으로 조달했고 대한통운 인수자금 4조1000억원 가운데 1조원 가량을 대우건설 보유 현금으로 충당했다. 이것이 위험한 M&A라는 것을 한국 재계 인사들은 알아 차렸다. 그렇지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재무 건전성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왜 그랬을까. 총수가 자신의 주변을 '예스맨들'로 채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총수가 좋아하고 듣고 싶어하는 말만했다. 진정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애정을 갖고 바른 말을 하던 '충신'들은 날아갔다. 이후의 결과를 우리는 안다.
영풍그룹 현황과 지배구조. 2025. 2. 10. 단위 %. [자료=공정거래위원회]
◆'단기차입금 1.8조(兆)'에도 "재무건정성에 아무 문제 없다"
최윤범 회장은 2019년 3월 취임 이래 고려아연의 재무건전성에 독(毒)이 되는 의사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최윤범 CEO 체제 이전까지만 해도 고려아연의 단기차입금은 100억원대였지만 이제는 100배가 넘는다. 그는 자본잠식 상태의 미국 스타트업(이그니오홀딩스)을 5800억원에 인수했고 신생 원아시아펀드에 5600억원을 투자해 1378억원의 손실이 났다.
그럼에도 고려아연은 "재무건전성에 아무 문제없다"는 보도자료를 쏟아내고 있다. '사상 첫 분기 적자'는 '(영업이익 기준으로) 100분기 연속 흑자 금자탑'으로 보도됐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은 "분기 실적 기준을 그간 영업이익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영업이익 기준으로 보도자료를 냈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실적 부진의 원인을 '환율 상승으로 인한 외화환산손실 등'으로 공시했다. '금융비용 증가'는 없다. 이그니오홀딩스 인수가 엔지니어 관점에서 기술적으로 가능해서 진행했다는 참모 발언도 나왔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거수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고려아연 연평균 당기순이익의 4.5배(2조7000억원)를 자사주로 매입해 '허공에 태우고' 여기에 사용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조(兆) 단위 유상증자를 하겠다는 안건이 이사회에서 일사천리로 의결됐다.
"단기차입금 4조원대는 위험 시그널"이라는 양심 선언이 고려아연 내부에서 나올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내부 인사가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고려아연에 애정을 갖고 있는 '고려아연맨'일 것이다.
최근 10년 고려아연 실적과 경영권 분쟁일지.
최윤범 회장 체제 이전까지만 해도 고려아연은 ROE(자가자본이익률) 두 자리수를 기록하는 '한국주식시장의 숨은 진주'였지만 이제는 '그저 그런 기업'이 됐다. 증권가에서는 고려아연의 올해 예상 ROE를 낮은 한 자리수(2.30%. 대신증권)로 내놓았다. 한국 주식시장의 제조 상장사 평균(6.0%)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업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몸에 좋은 약(藥)은 쓰지만 그렇기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훈을 고려아연은 상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