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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기 칼럼] 북핵동결과 제재완화, 한국경제는 준비돼 있는가

  • 기사등록 2026-08-24 0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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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이영기 산업부장 부국장]

대니얼 워츠 전미북한위원회 프로그램 매니저는 "제재 완화에 앞서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은 북한에는 명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출발점"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북한 핵을 용인하자는 뜻이 아니라, 일괄타결만 고집하면 제한적인 핵위협 감축의 기회마저 놓칠 수 있다는 의미다.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경제제재가 풀린다는 공식은 이제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는 단계를 넘어 생산·배치·운용하는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된 것 같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움직임도 ‘선(先)비핵화·후(後)보상’보다 핵·미사일 동결과 부분적인 제재 완화를 교환하는 쪽으로 기우는 모습이다.


한미연합훈련 축소와 북미 정상외교 재개 신호는 그 전조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핵탄두 전량 폐기를 요구하기보다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중단, 핵물질 생산 동결을 받아내고 제재 일부를 해제하는 ‘작은 거래’를 선택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 변화는 외교·안보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대북 경제제재가 조금이라도 풀리면 한국 경제의 위험 프리미엄과 산업 지형, 남북경협의 주도권이 동시에 움직인다. 한국은 제재가 계속될 때의 대응에서 제재가 부분적으로 풀릴 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준비가 돼 있어야 할 것이다.


◆ 제재 완화의 첫 수혜자는 한국이 아닐 수 있다


대북제재는 하나의 자물쇠로 잠겨 있지 않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와 미국의 독자제재, 한국의 대북거래 제한이 겹겹이 얽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결단을 내려도 유엔 제재를 혼자 없앨 수는 없다. 다만 행정명령 조정과 제재 면제, 특정 사업에 대한 허가를 통해 금융·인도지원·일부 교역의 숨통을 틔울 수 있다.


가장 먼저 거론될 분야는 식량·의약품을 비롯한 인도적 물자와 철도·도로 조사, 에너지·통신 등 민생 인프라다. 협상이 진전되면 광물 수출, 섬유 임가공, 관광과 물류가 단계적으로 논의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 건설·철강·시멘트·전력기기·철도차량·통신업체에는 거대한 잠재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그렇다고 ‘북한 개방=한국 기업의 독점적 기회’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제재 완화에서 시장을 선점할 국가는 중국과 러시아일 가능성이 높다. 두 나라는 국경 물류망과 결제 경험, 정치적 관계를 이미 확보했다. 북한도 경제적 의존이 곧 정치적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겠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 기업에 곧바로 우선권을 줄 이유는 없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도 유엔 제재가 북한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경제관계 확대를 가로막는 뚜렷한 장애물이라고 분석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 장애물이 낮아지는 순간 북한과 이미 거래망을 가진 중국·러시아 기업이 한국 기업보다 먼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미국과 일본 기업도 직접 진출보다 금융·보험·설비·컨설팅을 통해 수익성이 높은 상층부를 차지할 수 있다. 이와달리 한국 기업은 도로와 철도, 발전소 같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불확실한 회수 위험을 떠안을 수 있다. 남북경협이 ‘한국 자본의 북한 진출’이 아니라 한국이 비용을 부담하고 주변국이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로 귀결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국내 금융회사의 역할도 간단하지 않다. 북한 관련 거래는 자금세탁방지와 테러자금 조달 방지,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위험을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 정치적 합의만 믿고 자금을 집행했다가 협상이 결렬되면 투자금이 동결되고 기업은 국제금융망에서 제재받을 수 있다.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과 개성공단 중단 경험은 정치적 낙관론만으로 사업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영기 칼럼] 북핵동결과 제재완화, 한국경제는 준비돼 있는가대북제재 완화가 가져올 경제적 기회와 여전히 남은 한반도 안보 위험 [이미지=더밸류뉴스|AI생성] ◆ ‘북한 특수’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축소가 먼저다


제재 완화가 한국 경제에 가져올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효과는 북한 개발사업의 매출이 아니다. 한반도 군사적 긴장이 낮아지면서 한국 금융시장에 붙어 있는 지정학적 위험 프리미엄이 줄어드는 것이다.


북핵 위기가 완화되면 원화와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낮아지고 외국인 투자자의 한국 자산 평가가 개선될 수 있다. 국가와 기업의 외화조달 비용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북한의 ICBM 시험과 핵실험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만으로도 방산·외환·채권시장의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북한 특수’는 건설현장보다 자본시장에서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대가는 따져봐야 한다. 미국이 자국 본토를 겨냥한 ICBM만 동결하고 한국을 위협하는 단거리 전술핵을 사실상 묵인한다면 미국의 위험은 줄지만 한국의 위험은 고착된다. 표면적으로는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여도 한국 기업과 국민은 핵위협 아래 남는다. 이를 안정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한미연합훈련이나 전략자산 전개가 북한의 실질적 핵감축 없이 먼저 축소되는 것도 문제다.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은 환영할 수 있지만 동맹의 억지력이 약해졌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오히려 장기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커질 수 있다. 제재 완화의 경제적 편익은 반드시 북한의 검증 가능한 조치와 맞물려야 한다.


한국 경제주체들은 핵동결과 제한적 제재 완화가 병행되는 중간단계를 상정하고, 허용 사업과 금지 사업을 구분한 단계별 경협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대북거래 전담 결제망과 투자보증, 국제제재 준수 지침, 협상 파기 시 사업 철수 원칙도 미리 마련해야 한다.


한국 기업 역시 북한을 당장 수익을 낼 신흥시장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북한 인프라의 실태와 사업비, 법적 권리, 분쟁 해결수단, 투자금 회수구조부터 점검해야 한다. 정치적 기대를 근거로 대규모 선투자에 나서는 순간 남북경협은 경제사업이 아니라 회수 불가능한 정책금융이 된다.


북한의 핵보유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북한을 국제법상 핵무기국으로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다. 제거하기 어려운 위험을 우선 동결하고 줄여나가자는 현실적 선택이다. 마찬가지로 대북제재 완화도 무조건적인 퍼주기나 장밋빛 북한 특수로 볼 일이 아니다. 제재의 작은 틈을 한국 경제의 위험 감소와 산업 기회로 전환하는 정교한 전략이 필요하다.


트럼프는 북한 핵을 거대한 거래의 대상으로 본다. 김정은은 그 거래를 핵보유국 지위를 굳히는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 이 사이에서 한국이 준비하지 않으면 안보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고 경제적 과실은 중국·러시아와 글로벌 자본이 가져갈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통일경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핵을 가진 북한과 제한적으로 거래해야 할 시대를 전제로 한 냉정한 경제전략이다.


007@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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