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동국문헌비고'에는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따른 전국 팔도의 특산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땅의 성격에 맞는 최적의 물산을 길러 국가 경제의 균형을 도모하려 했던 선조들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우리 산업지도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 포항은 철강, 울산은 조선과 자동차, 구미는 전자산업을 대표했다. 각 지역은 지리적 여건과 축적된 기술, 인력, 협력기업을 기반으로 저마다의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고, 이는 한국 제조업 경쟁력의 기반이 됐다.
하지만 최근 산업지도는 빠르게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 용인도 반도체, 광주도 반도체, 대구도 반도체다. 지방마다 미래 산업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종착지는 반도체다. 지역별 산업 전략은 희미해지고, 국가 자원은 하나의 산업으로 집중되고 있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집적 산업이다. 설계(팹리스), 소재·부품·장비, 제조, 후공정, 연구개발이 긴밀하게 연결돼야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인 대만 신주 과학단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생산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협력사 엔지니어가 몇 분 안에 현장에 도착해 대응할 수 있는 신속함이 경쟁력의 핵심이다. 단순히 공장을 많이 짓는다고 같은 효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권역별 반도체 거점 조성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산업 생태계 조성보다 입지 분산 자체가 정책 목표가 되는 순간 생산성과 효율성은 오히려 떨어진다.
물론 반도체와 기존 산업을 융합하는 시도는 필요하다. AI 전환 시대에 반도체는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 기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반도체를 중심 산업으로 육성하는 것과 모든 지역 산업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전략이라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의 사이클에 국가 전체의 경제가 획일화되는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 산업 포트폴리오가 획일화될수록 국가 경제는 특정 산업의 경기 변동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균형발전은 모든 지역에 같은 산업을 하나씩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강점이 다른 만큼 역할도 달라야 한다. 수도권이 반도체 제조와 연구개발의 중심이라면, 다른 권역은 AI 데이터센터, 차세대 에너지, 미래 모빌리티, 첨단 소재, 바이오 등 각자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국가 전체의 효율성을 높인다. 예컨대 호남은 풍부한 재생에너지 기반을 활용해 AI 데이터센터나 그린수소 산업을 육성할 수 있다. 제조업 기반이 탄탄한 영남은 피지컬 AI와 차세대 배터리 등 제조 융합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 가능하다.
대한민국 산업 경쟁력은 특정 산업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만들어진다. 모든 지역이 반도체 공장 유치에만 매달리는 경쟁은 장기적으로 국가 산업의 다양성과 회복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반도체 클러스터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는 반도체답게 집적시키고 다른 지역은 각자의 강점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드는 일이다. 산업지도는 모두 같은 색으로 칠해질 때가 아닌, 서로 다른 색이 조화를 이룰 때 더 강해진다.
권소윤 더밸류뉴스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