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이영기 칼럼] 북핵 상수화 시대, 한국산업 가격표 바뀌어야

  • 기사등록 2026-06-15 08:00:03
기사수정
[더밸류뉴스=이영기 산업부장 부국장]

중국이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묵인하는 흐름이 굳어진다면, 이는 한국 경제의 할인율을 바꾸는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 한국은 반도체·배터리·조선·방산·자동차를 앞세워 세계 공급망의 핵심 노드가 됐다. 그 지위는 한반도 리스크가 관리 가능하다는 묵시적 신뢰 위에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그 신뢰가 흔들리는 국면으로 보인다.


중국이 북핵을 제어하기보다 전략적으로 관리하려 한다면 한국의 산업은 ‘첨단 제조 강국’이라는 프리미엄과 ‘핵 위기 접경 생산 기지’라는 디스카운트를 동시에 떠안게 된다.


과거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주로 지배구조, 낮은 배당, 재벌 체제, 소액주주 보호 문제로 설명됐다. 이제는 그 디스카운트 요인이 기업의 거버넌스 문제 등을 넘어 국가 리스크로 확장되는 양상이다. 외국인 투자자는 한국 반도체 클러스터를 볼 때 더 이상 생산성, 수율, 기술격차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생산 차질 가능성, 항만·전력망·해저케이블 취약성, 사이버 공격, 미국의 중국 제재 리스크, 중국의 경제보복, 한미일 군사협력의 반작용까지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포함될 것이다. 이것이 북핵 상수화가 한국 산업에 미치는 가장 정교하고도 치명적인 경로다.


[이영기 칼럼] 북핵 상수화 시대, 한국산업 가격표 바뀌어야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  비핵화 원칙만으로는 부족하다…억제·위험감축·대중 압박을 분리해야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대응은 “비핵화냐 억제냐”라는 이분법에 갇혀서는 안 된다. 첫째, 비핵화 트랙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국제법적·외교적 원칙으로 남겨야 한다. 둘째, 억제 트랙은 한미 확장억제의 실행력을 작전계획 수준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셋째, 위험감축 트랙은 비핵화와 별개로 열어야 한다. 핵물질 생산 동결, 핵·미사일 시험 제한, 군 통신선 복원, 서해·동해 우발충돌 방지, 핵 지휘통제 오판 방지 같은 낮은 단계의 의제를 분리해 다뤄야 한다.


비핵화라는 종착지를 포기하지 않되, 그 종착지가 멀어지는 동안 한국 산업과 금융시장이 매일 위험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구조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2024년 이래 채택된 핵억제 지침이 지금 이 국면에서는 의사결정 시간, 전략자산 운용, 재래식-핵 통합작전, 민간 전략시설 보호계획까지 연결돼야 한다.


중국에 대한 접근도 중국의 비용 계산을 바꾸는 쪽으로 해야 한다. 중국이 북핵을 방치할수록 한미일 미사일방어, 정찰위성, 전략자산 순환배치, 핵협의그룹 고도화, 한국 내 독자 핵무장 여론이 강화된다는 점을 중국의 전략 손익계산서에 넣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목표는 ‘탈중국’이 아니라 ‘중국발 충격에도 멈추지 않는 구조’여야 한다. 중국과는 핵심광물·소재·물류 핫라인을 유지하고, 동시에 미국·일본·호주·캐나다·유럽과 대체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북핵 문제에서 중국에 비용을 인식시키되, 산업 공급망에서는 관리 가능한 상호의존을 설계하는 이중 접근이 필요하다.

[이영기 칼럼] 북핵 상수화 시대, 한국산업 가격표 바뀌어야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 한미동맹은 ‘산업억제 동맹’으로 진화해야


더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한국 반도체·배터리·조선·방산이 미국과 서방의 AI·클라우드·해군력·방산 공급 망에 깊숙이 편입된 지금, 한미동맹은 군사동맹을 넘어 산업억제 동맹으로 확장돼야 한다. 한국은 동맹 내에서 단순한 안보 수혜자가 아니라 미국의 기술패권과 산업안보를 지탱하는 핵심 공급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전략산업 시설이 동맹 전체의 전략 인프라라는 점을 제도적 장치에 반영해야 한다. 평택·용인·이천의 반도체 클러스터, 울산·거제의 조선소, 창원·사천의 방산 생산라인, 배터리 소재와 셀 생산망은 한국 기업의 민간 자산인 동시에 미국 AI 서버, 방산 조달, 해군력 유지, 첨단제조 공급망의 필수 기반이다. 


북핵 리스크가 산업 리스크로 전이되는 시대에는 사이버 방어, 전력망, 항만, 보험, 금융이 모두 억제책의 일부다. 한국 기업의 해외 생산기지 확대를 단순한 탈 한국으로 볼 필요는 없고 오히려 지정학 리스크가 커질수록 이같은 다중 거점화는 산업 국가에게는 일종의 보험이다. 


다만 핵심은 생산기지를 나누되 기술통제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한국은 고부가 핵심 공정, 연구개발, 설계, 소재 데이터, 첨단 패키징, HBM 등 전략 공정을 유지해야 한다. 미국·일본·동남아·유럽 거점은 보완 생산망과 시장 접근 거점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국은 ‘위험한 지역의 제조기지’가 아니라 ‘동맹 공급망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전략 생산국가’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핵 상수화와 미국 정치의 불확실성 속에서 한국 산업의 입지가 독립적일 수는 없다. 우리의 전략은 핵보유 선언 없이도 북한의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고, 미국 확장 억제의 신뢰성을 보완하는 쪽으로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산업의 글로벌 지위는 더 이상 기술력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첨단 제조 역량은 지정학적 질서 위에서 가격이 매겨진다. 북핵 상수화와 중국의 전략적 묵인이 한국을 ‘핵위기 접경의 제조기지’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동맹 공급망을 통제하는 전략 산업국가’로 격상시킬 것인지는 한국의 외교·안보·산업정책 결합 능력에 달려 있다. 


한국은 더 이상 지정학의 피해자처럼 행동할 여유가 없다. 반도체 팹은 공장이 아니라 전략자산이고, 조선소는 생산시설이 아니라 해양질서의 후방기지이며, 배터리와 방산 공급망은 동맹의 지속능력이다. 북핵 리스크를 구조적 할인요인으로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전략적 불가결성을 높이는 계기로 전환할 것인가. 북핵 상수화 시대의 위험은 한국 산업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협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007@thevaluenews.co.kr

[저작권 ⓒ 더밸류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밸류뉴스' 구독하기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광고성 정보 수신

제휴 콘텐츠, 프로모션, 이벤트 정보 등의 광고성 정보를 수신합니다.
관련기사
TAG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6-06-15 08:00:03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더밸류뉴스TV
그 기업 궁금해? 우리가 털었어
더밸류뉴스 구독하기
리그테이블더보기
버핏연구소 텔레그램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