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계 '빅4' 가운데 지주사 체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은 LG그룹이다. 2003년 3월 LG그룹은 화학 부문 지주사 LGCI와 전자부문 지주사 LGEI를 합병해 ㈜LG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LG와 ㈜GS홀딩스 사이의 상호 지분이 정리되면서 지주사 체제를 완성했다. LG그룹의 지주사 전환은 국내 대기업집단 최초이자 잡음없는 '교과서적 모범 케이스'로 평가받고 있다.
◆ 재계 '빅4' 가운데 현대차 그룹만 순환출자 끊지 못해
SK그룹은 2003년 '소버린 사태'를 겪고 지주사 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2007년 7월 SK㈜를 투자회사(SK㈜)와 사업회사(SK에너지)로 인적 분할하며 지주사 체제를 출범시켰다. 2015년 8월 SK C&C가 (구)SK㈜를 흡수합병하면서 지금의 (신)SK㈜로 지주사 형태를 완성했다.
삼성그룹은 2015년 9월 (구)삼성에버랜드(당시 사명 제일모직)가 (구)삼성물산을 흡수합병하며 지금의 삼성물산을 출범시켰다. 앞서 2014년 삼성SDI→삼성물산의 고리를 끊으면서 순환출자를 해소했다. 이를 통해 이재용 회장 → 삼성물산(18.2%) → 삼성생명(19.3%) → 삼성전자(8.51%)의 지배구조를 만들었다. 비록 지주사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순환출자 고리는 없앴다.
한국 재계 '빅4'의 지배구조 유형. 2025. 9. 단위 %. [자료=공정거래위원회]
현대차그룹을 제외한 '빅3'가 법적으로 순환출자를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현대차그룹은 지금도 순환출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 → 현대차(22.3%) → 기아(34.8%) → 현대모비스(17.9%)'의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 말고도 순환출자 고리가 3개 더 있다(2025. 9).
왜 유독 현대차그룹만 순환출자 고리를 끊지 못한 걸까?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 현황. 2025. 9. 단위 %. [자료=금융감독원 전자공시]
현대차그룹의 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는 '전략의 실패'라고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현대차그룹은 그간 순환출자 고리를 끊을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놓치면서 지금의 순환출자 지배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다 운(fortune)도 따라 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자, 이제 우리는 2000년 8월의 어느 날로 간다. 한낮 무더위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한여름이다
◆ 현대글로비스 설립 → '일감 몰아주기'로 급성장 → 조(兆) 단위 차익
서울 종로구 현대그룹 계동 사옥 고층 회의실에서 정몽구 회장이 - 당시 62세 -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3년 후 정몽헌(1948~2003. 8) 현대그룹 회장이 투신자살하는 바로 그 빌딩이다. 정몽구 회장은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 정확히 말하면 정주영∙정몽구∙몽헌 3부자 동반퇴진 - 여전히 '회장님'으로 불리고 있다.
현대그룹은 당시 삼성을 제치고 압도적 재계 1위였다(공정거래위원회 발표 기준). 당시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의 격차는 지금의 삼성그룹과 SK그룹의 격차보다 컸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그룹에서 현대차, 기아차(현 기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등 10개사를 이끌고 이제 막 분가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한편에는 현대차그룹을 한국의 손꼽히는 대기업집단으로 키워야 한다는 원대한 꿈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현대모비스를 주력사로 키우고, 장남 정의선 - 당시 30세 - 의 지분 확보를 위해 '실탄'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구상은 착착 진행된다.
우선, 그해 11월 현대차그룹은 현대정공을 현대모비스로 사명변경하고 현대차와 기아의 핵심 부품사업을 인수하면서 현대모비스를 주력사로 키우기 시작한다. 당시 현대모비스 지분을 살펴보면 정의선 일가 지분이 30%를 넘어 추가 지분 매입이 급하지 않았다(인천제철 16.47%, 우리사주 6.71%, 정몽구 6.31%, 기아차 1.26%, 현대건설 0.56%. 합계 31.31%).
2017년 현대모비스 주주 현황. 단위 %. [자료=현대모비스 사업보고서]
그리고 이듬해인 2001년 2월 현대차그룹은 현대글로비스(당시 회사명 한국로지텍)를 설립했다. 당시 현대글로비스 지분의 100%가 정의선 일가(정의선 60%, 정몽구 40%)로 구성됐다. 설립 자본금이 약 50억원이었으므로 정의선 총수(당시 31세)의 투자금은 약 30억원이었다.
이후 현대글로비스는 이른바 '일감 몰아주기'로 초고속 성장했다. 2005년 현대글로비스는 매출액 1조5428억원, 영업이익 804억원, 당기순이익 787억원을 기록했다. 설립 4년만에 조(兆) 단위 매출액을 달성한 이 기록은 지금도 한국 재계 역사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그해 12월 현대글로비스는 코스피에 상장했고 정의선 일가는 1조 3000억원대의 평가 차익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설립 당시 투자금의 약 260배였다.
현대글로비스 매출액과 정의선 일가 지분 변화. 단위 억원, %. [자료=현대글로비스 사업보고서]
◆ 현대글로비스 매각 차익 얻었지만 현대모비스 지분 늘리지 않아
그런데 정의선 일가는 이 시기에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대글로비스 평가차익은 장부상 이익(paper gain)이었고 여기에다 2006년 3월 비자금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현대차그룹이 일감 몰아주기, 하청업체 대금 부풀리기 등을 통해 최대 1000억원대에 이르는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검찰이 밝혀낸 것으로 정몽구 회장이 구속 기소되고 정의선 총수는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정몽구 회장은 2008년 6월 파기 환송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 300시간을 선고받았고 2개월 후 이명박 정부의 광복절 특사 사면으로 처벌을 면했다. 수사가 진행되자 정몽구 회장은 사회 환원을 약속했고 2011년 현대글로비스 주식(7.02%. 약 5000억원)을 기부했다. 이같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정의선 총수의 현대모비스 지분 매입은 연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15년 2월.
정의선 일가는 현대글로비스 지분(13.39%) 매각에 성공해 1조 1000억원대의 현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시간외매매로 NH투자증권 등 다수 기관투자자들에게 매각하는 방식이었다. 조(兆) 단위 현금을 손에 쥔 것이다. 그런데 이때도 정의선 총수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늘리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이는 정의선 총수가 정몽구 명예회장 지분을 증여받을 경우에 발생할 상속세(혹은 증여세)를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지분에 최고세율(60%)을 적용하면 정의선 총수가 부담해야 할 상속세는 수조 원대로 추정된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올해 87세이다(1938년 출생). 현대자동차의 주거래은행은 하나은행이다.
이 시기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이 다급하게 진행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당시 현대차그룹은 공정위가 개정 공정거래법을 통해 총수 일가 지분이 3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현대글로비스 지분(43.39%)을 30% 미만으로 낮춘 것이다(29.99%). 여기에다 현대모비스 주식은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 이슈가 나올 때마다 가격 변동이 크다 보니 거액 자금을 투입해 원하는 물량을 확보하자면 가격과 시점이 중요한데 이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 것도 원인이 됐다. 재계의 한 인사는 "이 때 정의선 총수가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했다면 현대차그룹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하여 또 다시 3년이 흘러 2018년.
현대차그룹 연혁과 지배구조 개편 일지. 2025. 11.
그해 3월 우리는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공식 발표하는 것을 목격한다. 정의선 총수가 현대차그룹 총괄부회장 승진을 6개월 앞두고 지배력 강화가 급했고, 공정위의 지배구조 개편 압박이 다시 한번 거세진 시점이었다. 그 이후의 결과를 우리는 안다. 앞서 더밸류뉴스 '현대차 지배구조' 시리즈 1, 2회에서 언급한대로 현대차그룹의 '본심'을 엘리엇이 폭로하고,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ISS과 글래스 루이스가 가세하고, 국민연금이 '추인'하면서 현대차그룹 개편안은 무산됐다.
정의선 총수에게 '남은 카드'가 있는걸까? ('현대차 지배구조' 4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