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산업부장
3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극적 합의를 통해 상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킨 것이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고,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합산 3%룰 도입 등 그동안 재계가 강력히 반발해온 핵심 조항들이 모두 포함됐다.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코스피는 상법 개정 기대감에 힘입어 3100선을 돌파했다. 정부가 공언한 '코스피 5000 시대'를 향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더 주목할 점은 PBR(주가순자산비율) 1.05배 달성이다. 그동안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상징이었던 PBR 1.0 미만에서 벗어나 선진국형 밸류에이션에 한 발 다가섰다.3일 오후 코스피 지수가 3100을 넘어섰다. [자료=네이버페이증권]
상법 개정 효과를 구체적 수치로 제시하기도 했다. 증권 업계는 이사 충실의무 확대와 합산 3%룰이 본격 시행되면 PBR이 1.3~1.5배까지 상승 가능하며, 이는 코스피 3800~4200 수준에 해당한다는 분석이다. 현재 29%에 그치는 한국 기업의 배당성향이 40~50%로 개선될 경우, 배당 매력도 증가로 장기 투자자금의 지속적 유입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재계는 경영 자율성 침해와 글로벌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 특히 신속한 의사결정이 생명인 테크 기업들의 반발이 거세다.
과연 이 개정안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소수주주 보호 강화는 기업 경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무엇보다 지금이 상법 개정의 적기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남는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저평가 문제는 단순히 법 조문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KOSPI PBR 0.93배 저평가...이재명 정부, 상법개정 최우선 과제로 추진
상법 개정이 지금 시점에서 불가피해진 구조적 배경은 한국 자본시장의 만성적 저평가에 있다. KOSPI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93배에 머물러 있는 현실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대주주 중심의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가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제도적 개선에 대한 압박이 정치권으로 집중됐다.상법 개정안 주요 내용. [이미지=더밸류뉴스]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상법 개정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3월 민주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개정안이 한덕수 전 총리의 거부권으로 폐기된 후, 민주당은 이를 최우선 과제로 재추진해왔다. 국민의힘도 그간의 반대 입장을 철회하고 전향적 검토에 나서면서 여야 합의가 성사될 수 있었다. 자본시장 안정화에 대한 초당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3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된 개정안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해 모든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하도록 의무화했다. 둘째, 감사위원 선출 시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합산해 3%로 제한하는 '합산 3%룰'을 도입했다. 셋째, 전자주주총회를 의무화해 소액주주의 참여 장벽을 낮췄다.
하지만 재계의 강력한 반발로 일부 쟁점 조항은 이번 개정에서 제외됐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1명에서 2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내용은 추후 공청회를 통해 재논의하기로 했다. 이는 경영계의 우려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핵심 개정안은 통과시키는 절충안으로 평가된다.
개정안의 시행 시기도 주목할 점이다. 전자주주총회 관련 시스템 구축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통령 공포 즉시 별도의 유예기간 없이 시행된다. 이는 개정 효과를 조기에 가시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지만, 기업들의 준비 기간 부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감사위원 임기 만료가 임박한 기업들은 새로운 룰에 따른 감사위원 선임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 충실의무 '회사→주주' 확대...기업 경영철학의 근본적 전환
이사 충실의무 확대는 단순한 문구 변경이 아닌 기업 경영철학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기존에는 이사가 '회사'를 위해서만 충실의무를 부담했지만, 개정 후에는 '주주 전체'의 이익을 공평하게 고려해야 하는 법적 의무가 생긴다. 이는 대주주 위주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벗어나 모든 주주의 이익을 균형있게 반영하는 경영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강제하는 것이다.상법 개정안 합산 3%룰 적용 사례. [이미지=더밸류뉴스]
'합산 3%룰'의 도입은 지배구조 개선에서 가장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변화다. 현행 제도에서는 사외이사 감사위원 선출 시 최대주주 가족이 각각 3%씩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어 실질적으로 9%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합산 3%룰이 적용되면 이들 전체가 합산해 3%의 의결권만 행사할 수 있게 돼, 소액주주나 기관투자자들이 감사위원 선임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전자주주총회 의무화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주주 참여 확대의 핵심 장치다. 물리적 거리나 시간 제약으로 주주총회 참석이 어려웠던 소액주주들이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주주총회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되지만, 중소기업에게는 시스템 구축비용과 보안 문제라는 새로운 부담을 안겨줄 수도 있다.
독립이사제 도입도 간과할 수 없는 변화다. 기존 '사외이사'에서 '독립이사'로의 명칭 변경은 단순한 용어 교체가 아니라 역할과 책임의 실질적 강화를 의미한다. 독립이사는 사내이사나 집행임원으로부터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하며, 이사회 내 비율도 기존 1/4에서 1/3 이상으로 상향 조정된다. 이는 경영진에 대한 견제 기능을 한층 강화하는 장치로 작용할 것이다.
배임죄 적용 범위 확대에 대한 우려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 확대되면서 주주들이 경영진을 상대로 형사 고발을 제기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비록 법리적으로는 주주에 대한 배임죄 성립이 어렵다는 반론이 있지만, 소송 남발 가능성과 이로 인한 경영진의 위축 효과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업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저해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배구조 개선 vs 경영권 방어, 기업들 우려↑...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펀더멘털 개선이 우선
상법 개정에 앞서 기업들은 방어적 대응과 선제적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양면 전략을 구사해 왔다. SK그룹과 LS그룹 같은 대기업들은 자회사 상장 일정 조정을 검토하고 일부 기업들은 IPO 대신 교환사채(EB) 발행이나 유상증자 등 대체 자금조달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동시에 법무팀과 컴플라이언스 조직을 대폭 강화해 새로운 법적 리스크에 대비하고 있다.상법 관련 수혜주 성과 추이. [자료: 에프앤가이드, NH투자증권]주가에 미칠 영향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일 것으로 전망된다. 미래에셋증권 분석에 따르면 지배구조 개선 시 한국 증시의 상승 잠재력은 10~20% 수준으로, KOSPI PBR이 현재 0.93배에서 1.0~1.1배까지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지난 2일 개정안 합의 소식이 전해지자 HS효성이 상한가를 기록하고 한화가 15% 이상 상승하는 등 지주회사들의 주가 상승이 두드러졌으며, 3일 상법 개정안 통과 기대감이 반영되며 코스피 3100을 달성했다. 이는 PBR 약 1.05배 수준이다.
코스피 5000 달성을 위해서는 투명한 지배구조와 강화된 주주권이 실제 ROE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 현재 한국 기업의 평균 ROE 8~9%가 12~15% 수준으로 개선되면 PBR 1.5~2.0 수준의 선진국형 밸류에이션이 가능하다. 소액주주는 전자주주총회를 통한 참여 확대와 개선된 배당정책으로 연 5-7% 수준의 배당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고, 기관투자자들은 스튜어드십 활동 강화를 통해 포트폴리오 전체의 질적 개선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하반기 배당 시즌과 내년 본격적인 제도 정착 과정에서 실질적인 밸류업이 검증돼야 한다.
지주사(대,중소형 합산) 외국인・기관 60일 누적 순매수 금액 추이. [자료: 에프앤가이드, NH투자증권]그런 점에서 미국 사례는 상법 개정의 효과와 부작용을 동시에 보여준다. 올해 1월 델라웨어주 법원이 테슬라 소액주주의 손을 들어준 사례처럼 이사의 주주에 대한 신인의무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상장기업의 경우 인수합병 1건당 평균 3~5건의 주주대표소송이 제기되는 등 소송 남발 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도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하다.
외국인 투자자 유입 확대 효과도 기대된다. 전자주주총회 도입과 소액주주 권한 확대는 한국 주식시장의 접근성과 신뢰도를 크게 높이는 신호로 작용할 것이다. 패시브 펀드들은 법과 제도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질수록 유입되기 쉬운 자금이어서, 상법 개정이 해외 자본 유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ESG 경영을 중시하는 글로벌 투자자들에게도 한국 기업의 투명성 개선 의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재계의 우려도 현실적이다. 엘리언 매니지먼트의 현대차 경영권 공격 사례처럼 외국계 헤지펀드가 3%룰을 악용해 경영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주주간 이해충돌로 인한 의사결정 지연, 중소기업의 전자주주총회 시스템 구축 부담, 독립이사제 도입에 따른 이사회 전문성 약화 우려 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결국 상법 개정의 성공 여부는 긍정적 효과와 부작용 간의 균형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에 달려 있으며, 제도 도입과 함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보완책을 병행 추진하는 것이 핵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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