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중동에서 났지만 그 계산서는 한국 소비자에게 돌아왔다. 미국·이란 전쟁 직후 국내 기름값은 국제유가가 실제 원유 도입과 정제 과정을 거쳐 반영되기도 전에 빠르게 올랐다.
검찰은 4대 정유사가 위기 상황을 틈타 가격 경쟁을 제한했고, 그 부담이 주유소와 소비자에게 전가됐다고 보고 S-OIL(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GS칼텍스·SK에너지 등 4대 정유회사가 담합행위나 가격 추종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직접 담합 규모는 14조원대, 가격 추종에 따른 경쟁제한 효과까지 포함하면 20조원을 훌쩍 넘는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다.
이 사건을 가격 담당 임직원 몇 명의 일탈로만 보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정유산업은 본래 과점성이 강하다. 공급자는 소수이고, 소비자는 선택지가 제한돼 있으며, 주유소는 정유사와의 계약 구조에 영향을 받는다. 이번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돌발 사건이라기보다, 정유산업의 오래된 구조적 위험이 국제정세 불안이라는 외부 충격을 계기로 드러난 사례로 볼 수 있다.
기소범위나 법원판단에 앞서 사안의 성격 상 지금 바로 이사회와 사외이사의 역할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외이사가 매일 휘발유·경유 공급가를 들여다보며 ‘오늘 몇 원 올리지 말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점기업의 가격결정 구조가 공정거래 리스크를 안고 있는지, 경쟁사 정보 수집과 활용이 적법한 내부통제 안에서 관리되는지, 주유소와의 계약 조건이 시장 경쟁을 과도하게 제약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은 이사회와 사외이사의 중요한 책무일 것이다.
정유4사가 기름값 담합이나 가격추종을 하는 상황 [이미지 = 더밸류뉴스 | AI 생성]
◆ 막아야 했던 것은 ‘담합의 순간’이 아니라 ‘담합의 조건’
사외이사가 이번 담합 실행을 직접 알았거나, 당일 가격 인상을 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된다. 다만 공공성을 담보하는 사외이사라면 담합이 가능해지는 ‘조건’에 대해서는 점검했어야 할 것이다. 정유사 내부에서 경쟁사 가격 정보는 누가, 어떤 경로로, 어떤 목적으로 수집했는가. 국제유가 급변 시 공급가격 조정 기준은 문서화 됐는가. 전량구매계약의 손해배상 조항은 주유소의 거래처 변경을 사실상 어렵게 만드는 수준은 아니었는가 등등.
이 질문들은 가격 실무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통제와 이사회 감시의 문제다. 특히 정유사는 국민 생활비, 산업 원가, 물가, 에너지 안보와 직결되는 업종이다. 이런 기업의 사외이사는 일반 제조업의 사외이사보다 더 무거운 공공성의 감각을 가져야 한다. 과점기업에서 내부통제가 취약하면 그것은 단순히 회사의 법률 리스크로 끝나지 않는다. 소비자가 주유소에서 리터당 몇십 원씩 더 내고, 자영주유소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공급가를 떠안으며, 산업 전체의 비용구조가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도 이사회가 가격결정 구조와 유통계약의 공정거래 리스크를 충분히 점검하지 않았다면 사외이사 제도의 실효성은 의문에 부쳐질 수밖에 없다. 사외이사의 존재 이유는 경영진의 설명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 있지 않다. 경영진이 놓치거나 회피할 수 있는 위험을 회사 내부에서 먼저 제기하는 데 있다.
◆ S-OIL 권오규 현 사외이사 - 한덕수 전 사외이사 이력이 다시 거론되는 이유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S-OIL 전 사외이사 이력과 권오규 전 부총리의 현 사외이사 이력이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전 총리는 2021년 3월 S-OIL 사외이사로 선임됐고, 2022년 4월 총리 후보자 지명 직후 사임했다. 이번 의혹이 제기된 유가 담합 기간과 직접 맞물린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고위공직자 출신의 사외이사 이력은 정유사 이사회 구성과 사외이사 제도의 본질을 묻는 상징적 사례가 될 수 있다.
고위 관료 출신 인사가 정유사 사외이사로 영입되는 명분은 대체로 산업·통상 경험, 정책 이해도, 국제 감각, 규제 리스크에 대한 식견일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다면 정유사 이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질문도 분명하다. 더구나 권오규는 현재 S-OIL 이사회의 의장이다.
과점산업에서 가격결정은 얼마나 투명한가. 주유소와의 계약은 공정한가. 경쟁사 가격 정보는 합법적 범위 안에서 관리되는가. 회사의 수익모델은 소비자 후생과 충돌할 가능성이 없는가 등의 질문 말이다. 이 질문들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면, 고위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전문성이 공적 감시 기능으로 제대로 전환됐는지 의문이 남는다.
이번 정유사 담합 의혹은 2026년의 사건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제기한 질문은 훨씬 오래된 구조를 향해 있다. 소수 기업이 가격 형성에 큰 영향력을 갖고, 주유소는 계약 구조에 묶이며, 소비자는 통보된 가격을 받아들이는 구조가 과연 제대로 감시돼 왔는가. 이사회는 공정거래 리스크를 실질적으로 보고받았는가. 사외이사는 내부통제의 취약점을 묻고 개선을 요구했는가.
전쟁보다 빨리 인상됐다는 기름값은 시장이 아니라 산업구조가 만든 가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제 소비자가 물어야 할 차례다. 정유사 사외이사들은 무엇을 감시했는가. 사외이사 제도는 소비자 신뢰를 지키는 실질적 장치였는가, 아니면 과점기업의 평온한 이사회 운영을 보완하는 형식적 장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