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다보스 포럼에서 격식 없이 어울리며 ‘차세대 협력형 리더십’을 보여줬던 HD현대의 정기선과 한화의 김동관. 두 사람은 ‘K-방산’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의 팀이 분명했다.
어깨를 걸었던 팀은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인수전, 울산급 배치-III 5·6번함 수주전, 인재 영입 경쟁 등을 거치며 균열이 생겼다.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프로젝트를 계기로 그 팀은 갈라섰다. 바다 위 왕좌는 한사람에게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7.8조 KDDX수주를 넘어 '30년 해군력'과 '글로벌시장'을 둔 HD현대의 정기선과 한화의 김동관의 '진검승부'가 불가피한 형국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성년이 된 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협력 모델을 상징했다.
“동관이와는 워낙 잘 아는 사이”라며 웃던 정 회장의 말은 당시만 해도 굳건한 우정의 증표처럼 들렸다. 3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주요 국제 무대에서 격식 없이 어울리며 ‘차세대 협력형 리더십’을 보여준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의 동행이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섰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 단순 수주전 넘어선 ‘30년 해군 패권 경쟁’
KDDX 사업은 단순한 함정 건조 프로젝트가 아니다. 약 7조8000억원 규모로, 대한민국 해군의 차세대 주력함 6척(배치-I 3척, 배치-II 3척)을 건조하는 초대형 국방 사업이다. 특히 선도함(1번함) 사업자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후속 5척의 향방까지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번 승부는 향후 30년 해군력과 글로벌 함정 수출 시장 주도권을 결정짓는 분수령이다. 이 때문에 양측은 사실상 ‘물러설 수 없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정기선 회장의 ‘기술 수성’ 전략과 김동관 부회장의 ‘수직 계열화’ 전략이 정면 충돌하는 양상이다.
KDDX 형상 및 주요 특성. [사진=방위사업청]
◆ RFP 배포 직전 가처분 신청... 최종 사업자 7월 선정
지루하게 이어지던 '수의계약'과 '경쟁입찰' 사이의 갈등은 최근 방위사업청의 결정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방사청은 지난 2년간 표류하던 KDDX 선도함(배치-I) 건조 사업 방식을 '지명경쟁입찰'로 최종 확정하고, 지난 3월 26일, 방사청이 양측에 공식적인 제안요청서(RFP)를 발송함에 따라 멈춰 섰던 KDDX의 시계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만 HD현대중공업은 RFP 배포 직전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자사가 수행한 기본설계 자료 중 일부가 경쟁사인 한화오션에 공유되는 것은 영업비밀 침해라는 주장이다.
반면 방사청은 “설계 결과물은 국가 소유이며, 공정 경쟁을 위해 동일 정보 제공이 원칙”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양사는 다음 달 중순까지 제안서를 제출하고, 최종 사업자는 7월 중 선정될 예정이다. 이로써 KDDX 수주전은 실질적인 기술 대결인 '2라운드'로 전격 전환됐다.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의 조감도 이미지 (사진제공=HD현대중공업)
◆ HD현대, ‘보안 감점 1.8점’ 족쇄…가처분으로 승부수
정기선 회장에게 KDDX는 ‘조선 명가’의 자존심이 걸린 사업이다. 그러나 HD현대는 ‘보안 감점 1.8점’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이 감점은 오는 12월까지 유지되며, 미세한 점수 차로 당락이 갈리는 방산 입찰에서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해당 감점은 2014년 군사기밀 유출 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 직원들이 타 업체 설계 자료를 불법 촬영해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한화 측은 이를 ‘안보 리스크’로 규정하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반면 HD현대는 “이미 처벌을 받은 사안에 대한 과도한 제재”라며 반발한다. 또한 HD현대는 “기본설계 수행 업체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후속 단계도 맡는다”는 규정을 근거로 수의계약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KDDX 가상 시운전 조감도. [사진=한화오션]
◆ HD현대, 배치-II 포기하고 ‘선도함 올인’…한화, ‘올인원 방산 체계’로 반격
HD현대는 최근 KDDX 배치-II 개념설계 입찰에 불참했다. 이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배치-II 대신 핵심인 ‘선도함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판단이다. 일종의 ‘전략적 후퇴’로, 본게임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다.
김동관 부회장에게 KDDX는 한화오션 인수의 성과를 입증할 시험대다. 한화의 핵심 전략은 ‘수직 계열화’다. 한화시스템(전투체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엔진), 한화오션(건조)을 결합한 통합 설계 모델이다.
이는 ‘배와 무기를 따로 만드는 방식’을 넘어, 처음부터 하나의 체계로 설계된 함정을 구현하겠다는 전략이다. 기존 조선 중심 경쟁 구도를 ‘통합 방산 플랫폼’ 경쟁으로 바꾸겠다는 포석이다.
이번 KDDX 수주전은 단순한 사업 경쟁이 아니다. 두 차세대 리더의 전략, 철학, 그리고 그룹의 미래가 걸린 승부다. 좁은 수로에서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두 함정처럼,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승부에서 밀리는 쪽은 향후 10년 이상 특수선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고 ‘조연’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30년 해군력'과 '글로벌시장'을 두고 펼쳐질 HD현대 정기선과 한화 김동관의 진검승부가 2026년의 바다를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