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진 문화평론가·출판편집자·비평연대
OO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갑작스럽게 비틀거리더니 주저앉듯 쓰러져 버렸다. 찜통더위 속 땀을 뻘뻘 흘리며 대열을 지키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몸을 ‘움찔’하기는 했지만 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행인을 돕는 몇몇이 있었다.
△△대로 왕복 6차선 한복판에서 지적 장애인이 고함을 치고 드러누워 난동을 부렸다. 소란스러운 것보다도 쌩쌩 달리는 차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해 대형 사고로 이어질까 봐 불안했다. 그를 지켜보던 동네 주민은 경찰에 신고를 한 뒤 난동을 부리는 그가 안전한 인도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혀를 끌끌 차고 소동을 그저 구경만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마트의 계란 코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모두 저렴하고 품질 좋은 계란을 사기에 정신이 없지만, 한 손님만은 늘 동물 복지 계란을 구매한다. 그 손님은 모두가 일회용 비닐봉지를 거리낌 없이 구매할 때도 꼭 장바구니를 챙겨 환경 보호에 마음을 쓴다.
앞에서 나열한 세 가지 상황은 전부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다. 글의 서문에서부터 당당하게 제시해 놓았으니 나는 세 가지 상황에서 ‘쓰러진 행인을 도운 몇몇’, ‘지적 장애인을 경찰에 인도한 주민’, ‘늘 동물 복지 계란을 사 먹으며 일회용 비닐봉지 대신 장바구니를 애용하는 손님’일 것 같겠지만, 아니다. 나는 위에서 나열한 세 가지 상황 중, 두 가지에서는 선한 행동의 주체였으나 나머지 한 가지에서는 선하지 못한 방관자였다.
나는 쓰러진 행인을 돕고 환경 보호와 동물 복지를 위해 힘쓰지만 난동을 부리는 지적 장애인은 차에 치이든 말든 무시해 버리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왕복 6차선 도로에서 난동을 부리는 지적 장애인을 도울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지만 동물 복지나 환경 보호에는 무관심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셋 중 과반은 ‘착한 행동’이었으니 좋은 사람인가. 내가 돕지 않고 방관했던 그 사람에게도 나는 좋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사실 나는 세 가지 상황에서 전부 남을 돕거나 보호하려는 선의를 갖고 행동한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버스 줄에서 이탈해 구한 행인이 실은 유명인의 악성 루머를 생산·재확산하고 사람들의 악플을 유도하는 악질 유튜버라서, 그날 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악성 루머 영상을 유포했고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착한 행동’인가. 동물 복지 계란을 구매했지만, 동물 복지 등급을 위조한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내가 구매한 계란을 낳은 닭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맞나.
과장되게 비유를 들었지만, 비슷한 고민에 놓여 본 적 있을 것이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비슷한 딜레마에 빠진다. ‘착한 행동’을 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애쓰지만 내 행동이 정말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는 했는지 의구심이 드는 순간들이 온다. 작게는 어제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놓고 오늘 길바닥에 쓰러져 사람들의 통행을 방행하는 현수막을 모른 체했다는 죄책감부터 크게는 언급조차 하기 싫은 ‘도덕적 실수’에 대한 기억들까지. 저자 마이클 슈어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그런 고민을 하다하다 무려 그 고민으로 드라마도 만들고(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굿 플레이스>) 책까지 썼다.
“아무 이유 없이 친구의 얼굴을 후려쳐도 될까” 같은 황당한 고민, “좋은 일을 했고 기부도 많이 했고 평소 훌륭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다. 그러니 마트 치즈 시식 코너에 ‘한 사람당 하나’라고 분명히 적혀 있는데 세 개를 가져가도 괜찮을까” 같은 하찮은 고민. 모든 고민들은 시시껄렁한 일상 속 딜레마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끝까지 가볍지 않다. 마이클 슈어는 각각의 고민들에 그가 공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접목하는데, 그 과정에서 우스꽝스러운 고민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초석으로 변해 간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철학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NBC 방송국의 스타 프로듀서로, 그가 제작한 숱한 히트작 가운데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유명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 <굿 플레이스>, <브루클린 나인나인>이 있다. 이쯤 되면 이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철학자도 아닌 사람이 쓴 철학책이라니, 괜찮은 거 맞아?’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반인이 착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치열하게 묻고 고민한 (무려 408쪽짜리) 흔적이다. 그 이상의 값어치나 절대불변, 만고의 진리 같은 깨달음, 묵직하게 울림을 주고 평생 기억에 남는 한 문장 같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을 기대했다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가 없는 책이리라. 그렇지만 그 ‘쓸모없음’에 기꺼이 잠깐의 시간을 할애해 보길 권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그저 ‘그건 나쁜 일이니까’보다 좀 더 확실한 답변이 필요하다.”
나는 당신이 때때로 ‘좋은 사람’이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해서는 우리 앞에 놓일 이상하고 곤란한 고민들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에 대한 저자만큼의 치열한 고민이다. 이 고민에 도전하기에, 마이클 슈어의 위트 있고 쾌활한 목소리는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