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회장 최윤범)이 2일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Savannah)에 추진하던 전자폐기물 재활용 투자 계획을 철회한 사유를 밝혔지만 이것이 오히려 의문을 키우고 있다. 고려아연이 밝힌 투자 철회 사유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고려아연, "서배이 투자는 고려아연이 이그니오 인수 결정 전 사안"
2일 고려아연은 “이그니오의 서배너 투자 계획은 이그니오가 고려아연에 인수되기 전에 결정된 사안이며, 인수 당시 부동산 관련 문제와 환경허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나 조지아주정부가 이를 해결할 것이라고 연락받았다”고 밝혔다. 또 “지속적인 비용 지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자 2023년 조지아주와 합의 하에 계약을 파기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앞서 미국 현지 한인 매체들이 "고려아연의 미국 계열사 이그니오 홀딩스(Igneo holdings. 이하 '이그니오')가 미국 조지아주와 맺은 투자 약속을 파기했다"고 보도한 것에 대한 입장 표명이다.
이그니오 최대주주는 고려아연의 미국 종속법인 페달 포인트(PedalPoint)이며 주요 사업은 도시광산 제련소 운영을 통한 전자 폐기물 재활용이다. 고려아연 사업보고서 등에 따르면 이그니오는 PC, 노트북 등의 전자제품에서 구리, 금(gold), 팔라듐을 비롯한 재활용 원재료를 생산해 고려아연에 공급하는 사업을 수행한다. 고려아연이 2022년 7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페달포인트를 통해 총 4억4042만달러(약 5800억원)을 투자해 지분 100%를 확보했다.
이보다 앞서 2021년 10월 이그니오는 8500만달러(약 1160억원)를 투자해 서배너항 인근 시포트(Seaport)에 도시광산 제련소(Secondary smelter)를 건설한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이 이그니오를 인수하기 9개월 앞선 시점이었다. 당시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지사가 직접 성명을 통해 밝혔을 만큼 조지아주 현지에서는 주요 사안이었다. 조지아주에는 현대차, 한화, SK그룹의 현지 법인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이그니오는 서배너경제개발청(SEDA)에 이메일을 보내 "미국 동남부 지역과 서배너에 시설을 설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통지했다. 사유는 "신중한 고려와 SEDA와의 협의 끝에 이같이 결정했다"고만 언급했다. SEDA는 조지아주정부의 사업 실무를 진행하는 조직이다.
◆"고려아연 실사 시점에 서배이 투자가 핵심 이슈였을 가능성 높아"
고려아연은 이번 사안에 대해 "이그니오의 서배너 투자 계획은 이그니오가 고려아연에 인수되기 전에 결정된 사안"이라고 밝혀 고려아연이 서배너 투자에 관해 상세한 내용을 몰랐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렇지만 업계에서는 이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고려아연은 2022년 중순쯤 이그니오 투자 결정에 필요한 실사(due diligence)를 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점에는 이그니오의 서배너 투자가 실사의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그니오가 서배너 투자를 발표한 직후인 데다 투자 규모(1160억원)가 이그니오 자본금의 약 10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그니오는 2022년 매출액 637억원, 순이익 32억원을 기록했다. 2021년 설립됐고 자본금은 106억원이었다. 이그니오의 기업 사이즈를 감안하면 이그니오가 서배너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금액(1160억원)은 기업 운명을 좌우할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실사란 기업이 의사결정(decision making)에 앞서 대상 기업의 재무 현황, 사업 계획, 조직 구조 등을 체크하는 것을 말한다. 인수 대상 기업은 실사 기업이 요청하는 자료를 투명하고 상세히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중에 법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고려아연은 이그니오 실사를 진행하면서 서배너 투자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꼼꼼히 들여다봤고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투자를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고려아연은 "이그니오의 서배너 투자 계획은 이그니오가 고려아연에 인수되기 전에 결정된 사안"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잘 몰랐다"는 취지의 입장이다.
◆"리스크 갖고 있는 스타트업을 5800억에 인수한 셈"
고려아연이 실사 과정에서 이그니오의 서배너 투자에 관한 리스크를 파악했다면 이는 더 큰 문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리스크를 안고 있는 스타트업을 무려 5800억원을 주고 매입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려아연이 이그니오를 인수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고려아연은 최근 수년에 걸쳐 이그니오 인수, 원아시아펀드 관련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느라 차입금이 증가하고 있다. 올해 2분기 K-IFRS 별도 기준 고려아연의 현금성 자산은 1692억원으로 지난해 12월 대비 절반 가량(1468억원) 감소했다. 같은 기간 단기차입금은 7117억원으로 85.09%(3272억원) 급증했다. 이는 고려아연 1대 주주 영풍(고문 장형진)과 분쟁을 촉발시킨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고려아연은 리스크를 알았어도, 몰랐어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고려아연의 의사결정 과정과 경영 전략에 대해 의문이 증폭되고 있는 배경이다. 고려아연이 이번 사안을 상세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