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 서주호 기자
기업은 자신이 영위하는 비즈니스의 '마켓 사이즈(market size)'보다 더 커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산업이 100억원대의 시장 규모를 갖고 있다면 이 산업에 있는 기업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매출액 100억원을 넘어설 수 없다.
이 관점에서 한국의 30대 대기업집단 가운데 성장 가능성이 높은 곳을 꼽는다면 하림그룹(회장 김홍국)이다. 김홍국 회장은 '한국의 카길(Cargill)'이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카길이 속해있는 곡물·사료(유통 포함) 산업의 글로벌 마켓 사이즈는 4600억 달러(약 650조원)로 반도체 시장 규모 5800억달러(약 800조원)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카길은 이 분야 시장 점유율 1위로 지난해 매출액 230조원을 기록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 선정 글로벌 20위권이며 수익성이 워낙 양호하다 보니 비상장으로 남아있다.
하림그룹은 닭고기 회사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해운사 HMM을 인수하려다 실패하는 등 얼핏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판 카길'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어디로 가려는 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기업집단 29위, 육계(닭고기) 기반으로 해운, 사료, 식품가공 '수직 계열화'
하림그룹은 올해 초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 이하 공정위)가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 29위를 기록했다. 전년비 두 단계 하락했다. 그룹 전체 매출액 12조 4850억원, 순이익 2150억원으로 전년비 각각 10.71%, 64.00% 감소했다.
계열사는 하림지주, 팬오션, 팜스코, 하림, 선진(이상 상장사), 제일사표, 맥시칸 등 45개로 전년비 5개 감소했다.
이 가운데 매출액이 가장 큰 계열사는 팬오션이다. 지난해 하림그룹의 주요 계열사 매출액 살펴보면 팬오션이 4조3609억원으로 압도적 1위이고 이어 선진 1조9060억원, 팜스코 1조8545억원, 하림 1조4108억원, 제일사료 1조2039억원, 엔에스쇼핑 2977억원, 하림산업 705억원 순이다(이하 K-IFRS 연결).
'하림그룹'하면 우선적으로 연상되는 ㈜하림 비중이 의의로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림그룹은 육계 회사의 카테고리를 넘어선 지 오래다. 하림그룹의 사업 분야를 살펴보면 육계·식품가공(하림, 하림산업), 해운(팬오션), 사료(제일사료), 축산(팜스코, 선진), 방송(엔에스 쇼핑) 등으로 다변화돼 있다.
◆병아리 직접 키우며 쌓은 노하우로 닭고기 사업 효율화
하림그룹이 이같은 다변화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게 된 출발은 육계(닭고기) 사업이다.
김홍국 회장이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병아리 10마리로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돼지, 오리, 혹은 소(cow)가 아니라 닭을 선물 받았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만하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마켓 사이즈(market size)'에서 치킨 시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닭의 수는 660억 마리로 인간과 다른 가축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이 점에서 지구는 '닭의 행성'이다). 치킨 시장이 이렇게 방대한 것은 닭이 호모 사피엔스가 다루기에 알맞은 크기이고, 알을 수시로 낳으며-개량화된 사육 닭은 하루에 1개씩 낳는다-, 멀리 도망칠 만큼 비행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과 관련 있다.
김홍국 회장은 이같은 '메가 사이즈' 시장에서 효율화에 성공하며 사업을 가파르게 키워갔다.
닭고기 사업의 성패는 닭을 얼마나 더 적게 먹이면서 더 빠르게 키우는가에 달려있다. 잔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는 사실이다. 이를 계량화한 지표가 FCR(사료요구율·Feed Conversion Ratio)인데, 닭 1㎏을 키우기 위해 사용된 사료량을 의미하며 숫자가 낮을수록 투입된 사료량(원가)이 적어 좋다는 뜻이다. 김홍국 회장은 FCR을 1997년 2.06→2010년 1.6→2019년 1.5→2023년 1.43으로 낮추었다. 이는 닭고기 선진국 미국 보다 우월한 수치다. 하림이 FCR 0.1을 개선하면 연간 사료비 120억원 가량을 절감할 수 있다.
김홍국 회장이 FCR 낮추기에 성공한 것은 병아리를 직접 키우며 쌓은 노하우 덕분이다. 김 회장은 닭에 관한 한 손꼽히는 전문가이다. 2000년 무렵 하림이 운영하는 양계장의 닭들이 잇따라 폐사했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김 회장은 양계장 관리자에게 "양계장에 들어가 닭들이 실제 움직이는 공간인 바닥에 직접 누워 온도를 체크해봐라"라고 조언했다. 양계장 관리자가 바닥에 누워 온도를 체크하자 표준보다 고온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 회장 노하우로 문제를 해결한 케이스다.
◆팬오션 실적에 그룹 매출액 출렁... HMM 인수 실패하기도
육계 사업이 기반을 닦자 하림그룹은 수직 계열화에 나섰다. 2007년 축산 기업 선진을 인수했고 이듬해에는 또 다른 축산기업 대상팜스코도 인수했다. 2015년에는 벌크선사 팬오션을 인수했는 데, 이를 계기로 하림그룹은 수직 계열화를 일단락하고 그룹 매출액을 점프시켰다.
이 과정에서 하림그룹은 시행착오를 적지 않게 겪었다.
국내 1위 해운사 HMM 인수에 실패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림그룹은 지난해 HMM 인수전에서 동원그룹을 누르고 최종 단독 우선협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최종 단계에서 계약이 불발됐다. HMM 인수에 성공했다면 하림그룹은 재계 10위권으로 퀀텀점프가 가능했다.
2021년에는 더미식 브랜드를 선보이며 HMR 사업에 나섰지만 성과가 부진하다. 당시 김홍국 회장은 직접 시식회에 참여해 장기적으로 1조5000억원의 매출 목표를 밝혔다. 더미식 장인밥 등 제품 라인업을 확대했으나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기존의 트렌드와 정반대되는 고가, 고품질 제품을 지향해 이슈몰이에는 성공했으나 실적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룹 실적이 팬오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도 부담이다. 팬오션은 해운사(벌크선사)이다 보니 경기변동을 크게 받는다. 올해 대기업집단 순위가 하락하고 그룹 실적이 부진했던 것도 팬오션의 시황이 나빴기 때문이다. 팬오션은 지난해 매출액 4조3609억원, 영업이익 3853억원, 당기순이익 2450억원으로 전년비 각각 32.1%, 52.1%, 63.81% 급감했다. 닭고기 산업도 안정적이지 않다. 하림그룹측은 "닭고기 산업은 업황기복이 심하고 한미FTA로 시장이 개방되면서 완전경쟁에 내몰려 있다"고 밝혔다. 하림그룹이 갖가지 시행착오에도 사업 다변화와 수직 계열화에 적극적인 것은 생존을.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서울 양재동 첨단물류단지 조성에는 진척이 있다. 하림그룹은 지난 2016년 물류센터 건립을 목적으로 양재동 부지를 매입했지만 용적률 등을 놓고 서울시와 갈등을 빛었다. 지난 2월 서울시 승인으로 확정됐고 내년 착공에 들어가 2029년 완공 예정이다.
◆'오너 2세' 김준영·주영 경영 참여...부인 오수정 맥시칸 대표도
하림그룹의 지배구조는 김홍국 회장→하림지주(21.20%)→팜스코(56.3%)·하림(54.7%)·선진(100%)으로 이뤄지고 있다.
하림그룹은 가족 경영(family business)을 하고 있다. 김홍국 회장 장남 김준영은 하림지주 경영지원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닭고기 생산·유통 기업 올품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장녀 김주영은 하림푸드 사내이사로 근무하고 있고 차녀 김현영과 3녀 김지영도 경영 참여가 점쳐지고 있다.
김홍국 회장 부인은 오수정 맥시칸치킨 대표이며 하림지주 지분 16.6%를 보유하고 있다. 김홍국 회장 맏형은 김기만 하림산업 대표이며 백석예술대 총장을 지냈다.
하림그룹은 전북 최대 기업이며 본사가 전북 익산에 있다. 익산의 하림공장에서는 일평균 45만마리의 닭이 도계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김홍국 회장은 지난해 보수 25억9000만원을 수령했다. 하림지주와 팬오션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