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면'으로 사업 최전성기에 들어선 삼양식품(대표이사 김정수)의 성공 비결의 하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라면을 만들었다'로 요약된다.
다시 말해 삼양식품은 고(故) 전중윤(1919~2014) 창업주가 일본에서 터득한 라면 제조법을 바탕으로 1961년 삼양식품을 설립해 라면 1위를 했다가 공업용 우지 파동으로 존폐 기로에 몰리는 등 굴곡을 겪었지만 -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 - 영위하는 사업은 변함없이 '라면 만들기'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삼양식품은 라면 제조 노하우를 내재화했고 불멸의 히트작 '불닭볶음면'을 터뜨릴 수 있었다. 여기에다 때마침 한국의 국제 위상 점프로 글로벌 시장이 열리며 삼양식품은 지금의 글로벌 K-라면 키플레이어에 등극했다(운칠기삼(運七技三)은 인생사는 물론이고 비즈니스의 본질일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현대그룹(회장 현정은)은 난이도가 대단히 높은 도전에 직면해있다. 삼양식품이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줄기차게 라면을 만들어 라면 제조 노하우를 내재화해온 것과 달리 현대그룹은 계열사들이 분리되는 굴곡을 겪는 과정에서 해당 사업의 물적·인적 자산과 노하우가 통째로 소멸됐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이같은 허들(huddle)을 어떻게 극복하려는 걸까?
◆2016년 현대상선 계열 분리로 '중견 그룹'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해 매출액 2조6021억원, 영업이익 826억원을 기록했다(이하 K-IFRS 연결). 전년비 매출액은 22.2%, 영업이익은 92.1% 증가했다. 지난해 현대엘리베이터의 실적 개선은 리모델링과 유지보수 부문 성장과 현대무벡스가 연결대상으로 신규 편입됐기 때문이다. 그룹의 나머지 매출액은 현대무벡스(물류자동화), 현대아산(관광숙박, 여행 및 건설업) 등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대그룹 계열사를 살펴보면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무벡스(이상 상장사), 현대아산, 현대경제연구원, 현대홀딩스컴퍼니(이상 비상장사)를 포함해 총 39개다. 전년비 14개 증가했다.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그룹'으로 불릴 정도로 현대엘리베이터 비중이 압도적이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승강기(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무빙워크 등) 생산, 판매, 설치 및 유지보수 사업은 전체 매출액의 약 84%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재계 1위 그룹이었다. 고(故) 정주영(1915~2001) 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은 1980년대 중동 특수를 누리며 삼성그룹을 압도했다. 당시 현대그룹은 자동차(현대자동차), 조선(현대중공업), 건설(현대건설), 해운(현대상선), 금융(현대증권·자산운용)에서 1위(혹은 2위)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현대그룹은 당시의 계열사 대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 2003년 8월 정주영 창업주 5남 정몽헌(1948~2003)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불법 대북 송금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한 것을 계기로 자동차, 조선, 금융, 상선 등이 차례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2016년 7월 현대상선(현 HMM)이라는 메머드급 계열사가 분리되면서 현대그룹은 지금의 중견그룹이 됐다(HMM은 단일 기업이면서 공정위 발표 대기업집단 19위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삼양식품이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줄기차게 라면을 만들어 라면 제조 노하우를 내재화해온 것과 달리 현대그룹은 계열사 분리로 해당 사업의 물적·인적 자산과 노하우가 통째로 소멸됐다.
◆2030년까지 그룹 매출 5조 목표... 승강기 사업의 '디지털 노하우' 활용
여기에 대응해 현대그룹은 '디지털'에서 미래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현정은 회장은 지난 2022년 본사를 충북 충주로 이전하며 "2030년까지 그룹 매출 5조원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승강기 사업에서 쌓은 디지털 노하우를 바탕으로 본업을 확장하고 신사업에 진출해 이같은 목표를 달성한다는 전략이다.
엘리베이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다 보니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견인기, 브레이크, 제어 캐비닛, 속도 제한기, 안전 장치, 완충기, 가이드 레일 같은 복잡한 부품으로 구성돼 있고, 인간 안전을 다루다 보니 안전 기준이 높다. 연관 사업으로의 확장성도 높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증명하듯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무벡스는 연초부터 연이어 수주 성과를 발표하며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지난해 6월 출시한 AI 유지관리 서비스 ‘MIRI(미리)’는 현대그룹의 대표적인 디지털 전환 사례로 꼽힌다. 미리는 엘리베이터 현황을 스마트폰과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관리자에게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출시 후 8개월만에 2만5000대의 미리가 현장에 적용됐으며, 현대엘리베이터는 오는 2028년까지 10만대를 현장에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지난해 역대급 수주 성과를 보인 현대무벡스는 올해도 스마트 물류시스템 구축 사업 수주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무벡스는 지난해 2차전지 스마트 물류 사업에 돌입하는 등 신사업 영역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현재 글로벌 배터리 소재 기업들의 구미 양극재 공장, 아르헨티나 염수리튬 공장 등에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며, 지난 1월에는 에코프로비엠과 약 200억원 규모의 통합 물류자동화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여세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무벡스는 2021년 코스닥에 우회상장했다.
현대그룹의 전략이 성과를 내서 2030년까지 매출액 5조원에 도달하면 공정위 발표 대기업집단에 포함될 가능성도 있다. 갈 길은 여전히 멀지만 가능성은 보여주는 셈이다.
◆쉰들러 분쟁 마무리 수순... 현정은 회장 경영권 공고해져
현정은 회장은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부인으로 슬하에 정지이(장녀)·영이(차녀)·영선(장남)의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녀 정지이 현대무벡스 전무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고 외국계 광고회사에 근무하다 2004년 현대상선에 입사했다. 남편 신두식은 링크자산운용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차녀 정영이 현대무벡스 부장은 미국 와튼스쿨에서 MBA(경영학석사)를 받았다. 장남 정영선 현대투자파트너스 이사는 2003년 부친 정몽헌 회장이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나자 이후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결혼했다.
지난 10여년 간 현정은 회장을 위협해온 쉰들러와의 경영권 분쟁이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이 분쟁은 현정은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들이 2014년 현대상선(현 HMM)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여러 금융사와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맺은 것이 발단이 됐다. 해당 계약은 금융사들이 현대상선의 지분을 인수해 우호지분이 돼주면 인수자금에 대한 이자를 수수료로 지급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 때 현대상선 주가가 인수가격보다 떨어지면 보전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해운경기 불황으로 현대상선의 주가는 급락했고 이 과정에서 7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스란히 현대엘리베이터가 떠안은 것이다. 이에 현대엘리베이터 2대주주인 다국적 승강기 업체 쉰들러홀딩AGE(이하 '쉰들러')가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대법원은 현대엘리베이터가 170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현정은 회장은 현대무벡스 지분 2475만463주를 약 862억원에 현대엘리베이터에 넘기고 현대엘리베이터 주식담보대출을 통해 손해배상금을 완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국내 행동주의 펀드 KCGI자산운용(전 메리츠자산운용)가 주주서한을 통해 현대엘리베이터에 현정은 회장의 사내이사 사임을 비롯한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했다. 현 회장은 KCGI자산운용의 요구 전 이미 사내이사직 사임을 결심했으며, 지난해 말 20년만에 현대엘리베이터 사내이사직을 내려놓았다. 이에 현정은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 5.74%(224만5540주)를 현대네트워크에 장외 매도하며 보유 지분을 '0'으로 만들었다. 현정은 회장은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기타비상무이사에 임유철 H&Q코리아 대표이사를 선임했다. 임유철 대표는 현정은 회장 우호 세력으로 분류된다.
H&Q코리아는 올해 주식매매계약(SPA)을 통해 현대네트워크에 약 3100억원을 투자했다. 현대네트워크는 지난해 8월 현대홀딩스컴퍼니와 현대네트워크로 인적분할이 이뤄져 지주사 전환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현정은 회장의 사임과 함께 역대 최대 규모 배당이 실시되면서 행동주의 펀드들이 나설 명분이 사라지게 된 셈이다. 현정은 회장은 당분간 간접적인 형태로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