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진 문화평론가·출판편집자·비평연대
어릴 적, ‘서른 살’은 마법의 단어였다. 또래들의 다소 과격한 농담 속에서 서른 살은 종종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먼 미래의 모습으로 다루어졌고, 심지어는 ‘서른 넘어서까지 살아야 돼? 그냥 죽을래’ 하는 망언을 우스개 삼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내게 ‘서른’은 하나의 약속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나 자신을 ‘어른’이라고 칭할 수 있는 마지노선. 지극히 주관적인 이 기준은 MBC 인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의 서른 살 삼순이가 노처녀 소리를 듣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아무도 서른 살더러 노처녀라고 부르지 않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굳건하다.
그 가운데 나는 어느덧 연 나이 서른을 넘겨 비로소 어린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어른이 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이만 겨우 기준을 넘었을 뿐, 지금의 내 모습은 컵 떡볶이 사 먹고 학습지 풀던 어린 시절에서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른’의 사전적 의미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내 삶을 100 퍼센트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지 고민해 보면, 음, 아닌 것 같다. 지금 이 글마저 원고 마감 당일에야 부랴부랴 다듬고 있는 내가?
망나니 같던 학부생 시절을 지나 질풍노도의 ‘MZ’ 사회초년생으로 고군분투해 온 나의 20대를 돌아보면, 가장 크게 남는 감정은 끔찍하게도 다양한 '후회'들이다.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걸, 그때 그 행동은 하지 말걸! 대중문화에서 시간을 되돌려 후회로 남은 과거를 바꾸는 일상 타임슬립물 소재가 수백 년 전부터 단골 소재였던 것을 보면 지난 일에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후회를 해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닌 듯하다.
사회초년생 시절을 돌아보며 내가 했던 수많은 ‘후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단연코 이 생각이었다. ‘조금만 더 잘할걸!’ 나 역시 책 만드는 편집자 겸 기획자이기에, 내가 잘하고 싶은 대상은 늘 ‘도서 기획’이었다. <에디토리얼 씽킹>은 그 시절의 나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1순위 책이다. 격무와 반복된 일상에 지쳐 무언가를 잘 기획할 에너지 잃어버린 이 세상 모든 기획자들에게 억지로라도 떠먹여 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매거진 에디터로 20년을 일하며 그야말로 모든 ‘에디팅의 신’이 된 저자는 결코 잡지만으로 매체를 한정하지도, 대상을 콘텐츠만으로 좁히지도 않은 그야말로 ‘에디팅’의 정수에 대해 풀어놓는다. 적절하게 생략하는 법, 능동적으로 질문하는 법, 빈틈을 파고드는 법, 핵심을 집어내는 법.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데이터도 보장돼 있는 알짜배기 얘기들이다. 대다수의 콘텐츠 산업에 종사하는 저연차 기획자들은 ‘눈 돌아갈 만한’ 내용이 한가득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잡지든, 책이든, 영화나 드라마든, 유튜브 동영상이든, 방송이든 간에, ‘기획자’들 대부분은 해당 분야를 오래 향유해 온 당사자로서의 애정과 저절로 누적된 배경 지식, (트렌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젊은 나이를 무기 삼아 모호하고 막연한 감각만으로 기획 일을 시작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젊은 나이가 가져다주는 ‘날것의 감각’에는 필시 유통기한이 있다. 그것이 버텨주는 동안, 모호하고 생생한 감각을 노련하게 안정시킨 자들만이 기획자로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획자들은 날것의 감각을 노련하게 안정시키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다. ‘네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힐난한다면 할 말은 없으나, 노동력을 착취해서 이윤을 뽑아내는 국내 콘텐츠 산업 시장의 구조적 특성상, 개인이 낮은 임금과 부족한 시간,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 줌의 노력을 뽑아내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일을 배우고 싶지만 배울 시간도, 돈도, 체력도 없는 기획자들에게 이 책보다 더 귀한 레퍼런스이자 자기계발서가 있을까.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터닝 포인트’들이다.
꼭 기획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이 책을 읽어 보길 추천한다. B 매거진의 김명수 대표 추천사처럼, “에디터라는 전문 분야의 이야기로 위장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일을 (정말) 잘하고 싶은 사람, 스스로 결정하고 일의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좋은 글은 제가 하는 이야기 바깥으로 무한히 확장된다. 기획자로서, 또 일 잘하고 싶은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몇몇 부분은 꼼꼼하게 필기를 했고, 몇몇 부분은 가볍게 읽었으나 눈에 오래 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책장을 덮고도 오래도록 곱씹은 문장이 있다.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은 극악무도할 정도로 어렵다. (중략) 명확한 아이덴티티, 일관된 맥락과 서사, 날렵한 각을 가진 이들은 ‘무엇을 하지 말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고, 자기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일에서도, 삶에서도 그랬다.”(182쪽)
돌이켜보면 나는 끝없이 ‘일 벌이는 법’에 대해서만 배웠다. 내가 펼친 자기계발서는 하나같이 무언가를 해 보라고 종용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자꾸만 더하고자 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더하는 법만 배운 나는 샘처럼 솟구친 아이디어들을 하나의 줄기로 다듬어 취합하는 일을 특히 어려워하는 편이었고, 일을 하며 만난 또래의 기획자들에게서 나와 닮은 모습을 보았다. <에디토리얼 씽킹>의 저자는 ‘생략하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결정 장애’ 같은 신조어가 생기는, 우유부단과 포용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불안함과 막연함 사이에서 끝없이 고군분투한다는 점에서 삶과 에디팅은 닮았다.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선택(에디팅)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생략’을 제시하는 이의 이야기에 한 번쯤은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다. “당장은 잡음처럼 들려도 언젠가 그 안에서 희미한 신호가 들려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보는 태도, 카오스 안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질서가 있을 거라는 믿음”(55쪽)을 가질 수만 있다면, 기획 일이든 삶이든 두려울 것 없이 헤쳐나가 우리 스스로가 바라던 어른에 가 닿을 수 있게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