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우리 주베일 해군기지 건설을 맡은 미륭건설 최고경영자(CEO) 맞습니까? 너무 젊어보여 믿기 어렵군요."
1975년 4월의 어느 날 사막 열사(熱沙)의 뜨거운 바람이 몰아치는 사우디 아라비아 동부 주베일 항구의 막사.
이곳에서 김준기 미륭건설(현 동부건설) 대표를 맞이한 주베일 미 육군공병단 장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들이 발주한 4500만달러(약 620억원) 공사를 수주한 최고경영자가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새파란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김준기 DB그룹(옛 동부그룹) 창업 회장은 당시 미 육군공병단 지중해사령부가 발주한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를 따냈다. 그의 나이 만 30세였고 창업한 지 불과 4년차였다. 4500만달러는 당시 국내 건설사의 해외 수주 사상 최대규모였고 이를 계기로 한국 건설사들의 수주가 이어지며 중동신화가 시작됐다. DB그룹은 이를 기반으로 사세를 점프시켜 2000년대 초반 재계 10위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경영자의 차별화된 전략과 도전 정신이 기업을 얼마나 점프시킬 수 있느냐를 보여준다.
한편으로 DB그룹은 경영자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이 기업 운명에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지를 보여주는 케이스로 활용되기도 한다. DB그룹이 그간의 시행착오를 일단락하고 제2점프를 워밍업하면서 향후 어떤 길을 걷게 될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기업집단 35위, IFRS 17 도입으로 13단계↑
DB그룹(회장 김남호)은 올해 초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 이하 공정위) 발표 공시대상기업집단(일명 대기업집단) 35위를 기록했다. 전년비 13단계 상승했다. 순위가 13단계 급상승한 이유는 K-IFRS 회계의 보험부채 평가방법이 원가에서 시가로 변경되면서 보험 계열사(DB손해·생명보험 등) 공정자산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룹 전체 매출액 22조9307억원, 순이익 1조8461억원으로 전년비 매출액은 14.01% 감소했고 순이익은 7.95% 증가했다(이하 K-IFRS 연결).
계열사는 DB손해보험, DB INC, DB하이텍, DB금융투자(이상 상장사), DB생명보험, DB캐피탈 등 25개로 전년비 14개 감소했다.
지난해 기준 이들 계열사의 매출액 비중을 살펴보면 DB손해보험(19조7613억원)이 압도적이고 이어 DB생명보험 1조5046억원, DB금융투자 1조2070억원, DB하이텍 1조1542억원, DB INC 4586억원, DB캐피탈 403억원 순이다. 이들 계열사들을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주베일 신화' 주인공 동부건설(옛 미륭건설)이 보이지 않고 DB손해보험을 비롯한 금융 계열사가 주력을 이루고 있어 '동부'하면 떠오르는 고정관념과 차이가 있다.
◆"중후장대 사업 키워야"... 구조조정 거치며 금융·반도체 양대 부문 재편
이같은 변화의 계기는 2014년 시작된 구조조정이다.
DB그룹은 주베일 중동신화를 바탕으로 비약적으로 점프해 2000년대 초반 재계 10위권에 오르기도 했다(2001년 공정위 대기업집단 15위). 당시 DB그룹은 철강·금속·화학(동부제철, 동부메탈, 동부특수강), 전자·IT·반도체(동부대우전자, 동부하이텍), 금융(동부화재(현 DB손해보험), 동부생명보험) 등을 거느린 한국 재계 키플레이어였다. 초기 투자비가 많이 소요되는 계열사들이 대부분인데 이는 김준기 창업 회장이 "중후장대(重厚長大) 사업을 키워 국가 경제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동시다발적으로 기업을 키우느라 투자비가 과도하게 소모되며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특히 DB하이텍을 비롯한 반도체 계열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투자비로 그룹 자금줄을 옥죄었다. 결국 DB그룹은 2014년 동부익스프레스 지분 처분을 시작으로 혹독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2015년 동부건설이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계열 분리가 진행됐고 2019년에는 워크아웃 절차를 밟은 동부제철(현 KG스틸)이 산업은행을 거쳐 KG그룹에 매각됐다.
현재 DB그룹이 보험·금융과 제조의 양대 부문으로 재편된 것은 당시 구조조정의 결과물이다. 지난 2015년 53개에 이르던 계열사는 현재 25개로 슬림화됐다. '동부' 상표권을 갖고 있던 동부건설이 매각되면서 상표권 사용료 때문에 2017년 11월 그룹명을 동부그룹에서 DB그룹으로 변경했다.
DB그룹의 구조조정과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승자의 저주'에 빠져 그룹 자체가 붕괴됐거나 사세(社勢)가 기울어진 금호아시아나, 웅진, 진로그룹과 달리 살아남았다는 점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DB그룹측은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구조조정을 완결했다. DB그룹이 매각했던 계열사들이 이제는 이익을 내며 우량 기업으로 변모한 것을 보면 당시 전략이 옳았다"는 입장이다. 반대로 동시다발적으로 계열사 확장에 나서지 않았다면 유동성 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현재 DB그룹은 구조조정이 끝나고 계열사들의 실적이 전반적으로 개선되면서 제2점프를 워밍업하고 있다.
주력계열사 DB손해보험은 지난해 매출액 19조7613억원, 영업이익 2조4885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매출액(18조9320억원)은 증가하고 영업이익(2조7260억원)은 소폭 감소했지만 삼성화재(20조8247억원)에 이어 손해보험사 매출액 2위를 기록했다. 손해보험사 중 운전자보험 부문 1위로 지난해 운전자보험 신계약을 154만1562건 체결했다. 연간 운전자보험이 100만건을 넘은 국내 보험사는 DB손해보험이 유일하다.
국내 손해보험 시장이 이른바 '승자독식(Winner takes all)' 시대에 진입하면서 이른바 '손해보험 빅4(삼성·DB·현대해상·메리츠화재)’의 수익성은 가파르게 개선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이들 빅4의 손해보험 시장 점유율은 85.3%에 달하고 있다.
◆DB하이텍, 만년 적자에서 '황금알 낳는 거위' 점프
제조 부문에서는 DB하이텍 실적 개선이 두드러지고 있다. DB하이텍은 반도체 생산 전문 기업(Foundary)이다. DB하이텍의 지난해 실적을 살펴보면 매출액 1조1542억원, 영업이익 2654억원, 당기순이익 2641억원을 기록했다. 전년비 각각 30.86%, 65.16%, 52.51% 감소했지만 반도체 약세장을 고려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다. 2022년에는 매출액 1조6695억원, 영업이익 7619억원, 당기순이익 5562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에 영업이익률 45.64%를 달성했다.
DB하이텍은 DB그룹에게 '애증의 기업'으로 꼽힌다. DB하이텍은 설립 18년째인 2015년에야 처음 흑자전환했다. 흑자전환을 위해 김준기 창업 회장이 지난 2009년 그룹 내 모든 투자 유치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사재 3500억원을 투입하기도 했다.
◆DB아이앤씨, 지주사 전환 진행중
DB그룹의 현안으로는 지주사 전환이 꼽힌다. 현재 DB그룹 지배구조를 살펴보면 지주사가 확실하지 않고 김준기 창업 회장과 김남호 회장이 개인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형태를 갖고 있다. 김남호 회장→DB손해보험(9.0%)→DB금융투자(25.1%)·DB앨엔에스(100%)로 이어진다. 지주사격에 해당하는 DB아이앤씨(DB INC) 지분을 살펴보면 김남호 회장(16.83%), 김준기 창업 회장(15.91%), 김남호 회장 누나 김주원 부회장(9.87%) 순이다. DB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남호 회장은 김준기 창업회장 장남으로 2020년 7월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특정 기업 자산총계가 5000억원이 넘고 자회사 지분가치가 전체 자산의 50% 이상일 경우 지주사로 전환하도록 하고 있다. 지주사로 전환된 이후에는 상장자회사 지분을 30% 이상 의무적으로 보유해야 한다. 지난해 말 기준 DB아이엔씨 자산총계는 8794억원인데, 이 중 DB하이텍 지분(18%) 가치가 약 4696억원으로 53.4%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공정위는 지난 5월 DB그룹에 DB아이앤씨의 지주사 전환을 통보했다.
DB아이엔씨가 지주사 행위 규제 요건(자회사 지분 30% 이상 보유)을 충족하기 위해선 앞으로 2년 이내 DB하이텍 지분 11% 가량을 더 사들여야 된다. 지분 추가 매입에 소요되는 비용이 수천억원대임을 고려하면 DB하이텍의 주가상승이 그룹 입장에서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