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60여개를 거느리고 있는 어느 대기업집단 총수가 있다. 이 총수는 핵심 계열사 A지분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고 B계열사 지분만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기업집단의 현안은 총수가 A계열사 지분을 확보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이 대기업집단은 계열사 A, B를 합병했고 이 결과 총수는 단숨에 A계열사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 시민단체가 이를 고발하면서 이 사안은 법정으로 넘어갔다.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3년 5개월의 공방 끝에 지난 2월 무죄를 선고받은 '이재용 회장 삼성물산 부당합병' 1심 판결을 요약한 것이다.
검찰 항소로 이번 사안이 다시 재판에 들어가면서 검찰이 사건 내용을 어느 정도로 보완할 것인지, 새 팩트가 얼마나 등장할 것인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다음달 22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백강진 김선희 이인수 부장판사)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회장을 포함한 14명에 대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 사건 공판준비 절차를 진행한다.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그룹 전체 지배
이번 항소심의 핵심은 2015년 9월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불법이 있었느냐에 관해 얼마나 새 증거가 나오느냐가 판가름할 것으로 보인다.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이재용 회장의 승계 작업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불법은 없었다고 판단했고, 여기에 맞서 검찰은 증인 11인과 새 증거 2000개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재용 회장의 삼성그룹 지배력은 확고하다. 2004년 삼성 임원들이 삼성그룹이 적대적 M&A(인수합병) 위험이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공정거래위원회를 방문해 이를 설명했던 때와 다르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재용→삼성물산(18.26%)→삼성생명(19.3%)→삼성전자(8.6%)→삼성SDI(19.5%)·삼성SDS(17.1%)로 이어진다. 여기에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생명(10.4%), 삼성전자(0.7%), 삼성SDS(9.2%) 개인 지분도 갖고 있다. 이재용 회장이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18.26%) 가치만 해도 4조 3800억원이다. 1994~1995년 고(故)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증여받은 실질 증여금 45억원이 30년만에 100배 가량 불어난 셈이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이재용 지배구조' 완성
이재용 회장이 이같은 지배 구조를 갖게 된 출발은 2015년 9월 삼성물산·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 합병에 있다. 지금의 항소심이 진행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합병 직전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삼성물산이 삼성SDS(17.1%), 삼성전자(4.1%), 삼성테크윈(4.3%), 삼성엔지니어링(7.8%), 삼성정밀화학(5.6%), 제일기획(12.6%), 제일모직(1.4%) 지분을 보유하며 사실상 지주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재용 회장은 삼성물산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대신 이재용 회장은 제일모직 지분(23.23%)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면서 이재용 회장은 단숨에 삼성물산 1대 주주(17.23%)에 올라섰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10년 눈앞인데 주가 제자리
이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10년이 가까워지면서 당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겼다.
우선, 당시 두 회사 합병의 명분으로 제시했던 두 회사 시너지가 발생했느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이다. 삼성물산 주가는 합병 이후 10년 가까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20일 오후 현재 삼성물산 주가는 13만5200원으로 2015년 9월 합병 무렵 13만원에서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삼성물산 주주 재산을 전혀 불려주지 못한 셈이다. 주식 시장 참여자들이 두 회사 합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애초에 건설업과 패션 사업이 시너지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지적이다.
삼성측이 두 회사 합병 시너지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번 1심 판결문에도 드러나 있다. 1심 재판부도 "삼성측이 삼성물산 제일모직을 합병한다고 했음에도 막상 제대로 된 시너지조차 검토하지 않았고, 합병 시너지 수치를 제공하지 못해 국민연금이 수치를 조작했다"고 봤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두 회사 합병이 승계와 지배력 강화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전체적으로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며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피고인 14명에게 제기된 혐의 19건 모두를 무죄 선고했다.
최근 참여연대가 새로 제기한 국민연금 손실 보전 건도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참여연대는 지난달 27일 '메이슨 중재 판정문을 통해 본 삼성물산 불법합병의 문제점과 정부·국민연금의 역할 모색 좌담회'를 가졌다. 이 행사에서 김은정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집행위원은 "이재용 일가(이건희·이재용·이부진·이서현)는 합병 기준일에 제일모직 42.2%, 옛 삼성물산 1.4%를 보유한 반면 국민연금은 옛 삼성물산 11.2%, 제일모직 4.8%를 보유해 서로 정반대 입장이었다"며 "이재용 일가는 3조1000억~4조1000억원의 이득을 얻었지만 국민연금은 5200억원~6,750억원 손해를 입었다"며 "이재용 회장 등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심 판결 내용에 대한 공방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종보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는 "에버랜드 상장과 삼성물산 합병 시나리오는 고(故) 이건희 회장 시절부터 계획됐고 '프로젝트 G' 문건(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계획)은 삼성 미래전략실이 계획한 대로 이뤄졌음에도 1심 재판부는 두 회사 합병이 윤주화 제일모직 패션 부문 사장 제안에 따라 진행됐다고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이재용 회장은 2015년 5~9월 제일모직의 삼성물산 흡수합병(합병 비율 1 대 0.35)을 위해 허위 합병 명분을 만들어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허위 시너지 수치를 만들어낸 혐의로 2020년 9월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2월 재판부는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은 항소했다. 이재용 회장은 2021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과 관련해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그해 8월 가석방됐다. 이듬해 8월 사면됐고 10월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