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역대급 '반도체 한파'로 주식시장을 곡소리로 채웠던 삼성전자(대표이사 한종희 경계현) 주주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삼성전자 주가가 '9만전자'를 목전에 두고 상승 랠리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사업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에서 연간 14조88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부진을 보였으나 올해 봄날을 맞이할 전망이다. 지난 5일 1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6조6000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공시했다. 이는 전년동기대비 약 10배에 해당하는 호실적으로, 증권가 기대치(컨센서스)를 20% 이상 상회하는 일명 '어닝 서프라이즈'다.
다만 삼성전자의 깜짝 실적 공시에도 불구하고 당일 주가는 오히려 1% 하락하는 등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증권가에서는 이를 차익실현 매도 물량으로 인한 하락으로 진단하고, 향후 추가적인 주가 상승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반도체 업계 대규모 감산 효과 '적중'...1분기 반도체 부문 흑자 전환 성공
삼성전자의 1분기 DS부문 영업이익은 1조원대 규모로 추정한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1년 만에 적자에서 벗어나 반도체 실적을 단숨에 끌어 올린 비결이 바로 '감산'이다. 생산을 줄였는데 실적이 좋아진 것이다.
반도체 산업은 성숙기에 접어들면 수요와 공급 시간차에 의한 '반도체 사이클'이 일어난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반도체 수요가 감소하고, 초과 공급이 발생한다. 이는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고, 기업들은 실적 방어를 위해 감산을 감행한다.
기업들의 연쇄적인 감산은 시간이 흐르면서 초과 수요와 가격 상승을 유발한다. 이에 가격 수혜를 누리기 위해 기업들이 다시 증산에 나서는 '치킨 게임'이 반복되는 것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은 2022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반도체 불황의 늪에 빠져 지난해 대규모 감산을 감행했다. 이후 감산 효과에 따른 재고 소진으로 지난해 10월부터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다시 꾸준한 반등세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D램 가격은 전분기대비 약 20%, 낸드 플래시 메모리 칩은 23~28% 상승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은 일정한 주기의 경기 순환 사이클을 거치며 성장해 왔다. 이번 삼성전자의 호실적은 반도체 업황이 본격적으로 업사이클(상승추세)에 진입했음을 시사하는 시그널로 주주들의 기대감을 부추기고 있다.
◆AI 열풍에 빠른 속도로 회복한 반도체...상승 랠리 이어갈까
이번 상승 사이클 역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이클은 일반적인 사이클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반도체 산업은 통상 바닥 지점으로부터 2년여간 업사이클을 거쳐 업황이 피크(정점)를 찍으면 다시 2년여간 점진적인 다운사이클이 이어지는 4년 주기의 호황이 발생한다. 하지만 직전의 다운사이클은 코로나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경기침체 등이 맞물리면서 반도체 산업에 전례 없는 수준의 수요 급감을 불러왔다. 이에 당시 업계에서는 반도체 수요 회복까지 기존 사이클보다 훨씬 오래 걸릴지 모른다는 분석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오히려 불과 1년여 만에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대규모 감산 효과가 적중한 영향도 주효했지만, 가장 큰 배경에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이 있다. 챗GPT의 등장으로 시작된 전 세계 인공지능(AI) 열풍은 AI 고성능 컴퓨터 제작에 사용되는 'AI 반도체'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로 이어졌다.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3사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높인 고성능 메모리 HBM은 최근 3사가 엔비디아 수주를 위해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제품이다.
과거 케이스들을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기술 변화에 따른 수요가 급등하는 경우, 오랜기간 업사이클이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2010년대 초반 스마트폰 대중화가 진행되던 시기가 대표적인 예다. 현재 AI 산업이 아직 태동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역대 최고치를 넘어서는 것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12단 적층 'HBM3E' 3분기 공급 예상...속도 붙은 반도체 경쟁
삼성전자는 당분간 반도체 수요가 지속될 것으로 판단하고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SK하이닉스와 4세대 HBM 경쟁에서 뒤지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HBM 시장에서 올해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5세대 HBM(HBM3E)은 업계 최초로 D램 칩을 12단까지 적층해 기존 HBM3(4세대) 8단 제품 대비 성능과 용량 모두 50% 향상됐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HBM 공정과 수율이 지난해 대비 큰 폭으로 개선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2분기 중에 HBM3E 12단의 최종 인증 가능성이 높다"며 "3분기부터 본격 공급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HBM 공급 본격화에 따라 D램 전체 매출에서 HBM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 4분기 18%로 전년동기 9% 대비 2배 이상 증가될 전망이다. 김광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작용하던 HBM 시장에서의 경쟁사와의 격차도 지속해서 축소되고 있다"며 목표주가를 11만5000원으로 상향하기도 했다.
또 삼성전자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몰려있는 미국 시장 선점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신공장을 건설 중이다. 지난 5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오는 15일 테일러 공장에 대한 투자 규모를 총 440억달러(한화 약 60조원)까지 확보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초기 투자금액인 170억달러(약 23조원) 대비 2배 이상 확대된 규모다.
이에 외신들은 삼성전자가 미국 정부의 반도체지원법에 따라 60억달러(약 8조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 7일 미 정부는 파운드리 1위 TSMC에 66억달러(약 9조원)의 보조금을 지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에 대한 미 정부의 인센티브 지급 규모는 다음주 중에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