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지금까지 직접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온 것과 달리 3월 들어 이례적으로 은행권에서 돈을 구하고 있다. 회사채 등 자금시장 경색 조짐이 보이자 이전에 열어놓았던 한도대출에서 실제 대출을 일으킨 것이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은행의 대기업 대출 잔액은 이달 20일 현재 78조6731억원으로, 지난 2월 말보다 1조7819억원 증가했다.
대기업은 통상 연말을 맞아 재무제표상 재무 건전성이 좋아 보이도록 하기 위해 대출을 줄였다가 이듬해 초 다시 늘리는 관행으로 1월에 대출이 많이 증가한다. 하지만 이달 들어 20일까지 증가한 규모는 2월 한달간 증가액인 7883억원의 두배가 넘고, 1월 한달간 증가액 1조7399억원보다 많다.
최근 2년 이내에 1월을 제외한 다른 달에 5대 은행의 대기업 대출이 1조7000억원가량 늘어난 사례는 없을 정도로 이례적이다. 대기업은 대개 회사채와 같은 직접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탓에 대출 잔액이 일정 수준에서 증감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 대기업 대출이 많이 늘어난 것은 사전에 받은 한도대출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어서다. 개인으로 치면 혹시나 몰라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해 놓고 사용하지 않다가 갑자기 현금이 필요해 마이너스통장에서 실제 대출을 받았다는 의미다.
하나은행은 "업종에 상관없이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한도대출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대기업이 회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서 회사채도 투자자들에게 외면을 당해 직접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온 대기업들이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특히 회사채 만기가 다달이 돌아오고 있어 회사채의 차환 발행이 문제가 된 것이다.
금융투자협회에 의하면 다음달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규모는 6조5495억원으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91년 이래 4월 기준 역대 최대 물량이다. 4월을 포함해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는 38조3720억원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들어 차환 발행이 어려워 대출을 물어보는 상담이 많이 들어온다"며 "회사채 금리가 떨어져 투자 매력이 없어진 점도 회사채 차환 발행이 어려워진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