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480원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 숫자를 단순한 외환시장 지표로만 보기엔 그 무게가 여느 때와 다르다. 환율 안정은 이재명 정부가 출범 첫해에 맞닥뜨린 사실상의 첫 경제 시험지로 떠올랐다. 지금 외환시장은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까지 연일 회의를 이어갈 정도로 급박한 형국이다. 특히 한국은행이 원화 급락을 놓고 내부 회의를 열었다는 사실은 여러 해석을 낳는다. 중앙은행은 정치 일정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외환시장이 그 말을 곧이 들을지 의심스럽다. 시장은 오히려 정치 일정을 먼저 계산에 넣을 공산이 크다.
현재 한국의 외환 당국은 원·달러 환율 1500원 선이 뚫리지 않도록 연일 대책 회의를 열고 있다. 환율 폭등에 따른 물가 불안으로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외환시장의 시험...이재명 정부, 어떤 답안을?
환율은 언제나 정권 교체기의 약점이었다. 정책의 연속성이 흐려지고 메시지가 오락가락할 때, 시장은 가장 먼저 ‘빠져나갈 길’부터 확보한다. 지금 원화가 약세를 보이는 이유를 단지 달러 강세 탓으로 돌려봐야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앞으로 무엇이 바뀔지 모른다는 정책 불확실성이 이미 환율에 반영되고 있다는 해석이 더 정확하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 구상은 비교적 분명하다. 재정의 역할을 강조하고 분배와 내수 회복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이 방향성이 환율 앞에선 전혀 다른 얼굴로 읽힌다. 현 외환시장의 불안은 정부의 재정 지출 정책과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2025년 국고채 발행 규모는 본예산 기준 197조 원대에서 추경을 거치며 207조 원 수준까지 불어났다. 전년 대비로는 30% 안팎 늘었고, 최근 3년 평균과 비교해도 증가 폭이 두 자릿수다.
급증한 국채 발행 수치를 놓고 정치적 평가를 내리기 전에, 시장이 먼저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라고 봐야 한다. 재정 확대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와 별개로, 외환과 채권 시장은 국채 공급 증가를 곧바로 금리와 환율 변수로 환산한다.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민생과 체감 경기’라는 기조 역시 환율 앞에서는 속도의 문제가 된다. “속도 조절 없는 재정 확대는 환율에 벌금처럼 작동한다”는 평가는 경제학의 상식이나 다름없다. 정책의 선의와 시장의 반응 사이에는 늘 시간차가 있지만, 환율은 그 여유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시장은 정책 의도보다 시장 원리에 충실하다. 정책 의도가 시장 원리와 어긋날수록 원화 가치는 반대로 움직인다. 증세 없는 재정 확대, 가격 통제에 가까운 정책 신호, 시장 개입적 발언이 반복될수록 원화에는 ‘정책 리스크 프리미엄’이 붙는다. 환율은 그렇게 말없이 가격으로 응답할 뿐이다.
◆ ‘환율은 나중 문제’라는 착각
한국 정치에서 환율은 늘 후순위였다. 집값, 일자리, 복지가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외환시장은 그런 서열을 인정하지 않는다. 환율이 흔들리면 금리와 물가, 성장률이 동시에 요동친다. 이재명 정부가 강조해 온 ‘서민 체감 경제’ 역시 환율 앞에서는 가장 먼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미 비슷한 장면은 최근에도 있었다. 2022~2023년 환율이 1400원대를 넘어서며 원화가 급락했을 때, 수입 물가는 빠르게 뛰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저소득층으로 향했다. 환율은 결코 부자들만의 숫자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서민에게 더 가혹하게 작용하는, 가장 역진적인 세금에 가깝다. 폴 크루그먼이 말했듯, 환율 위기는 언제나 정치적 위기로 번진다. 외환시장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2001년 아르헨티나 통화위기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다.
한국이 1997년의 외환위기에 내몰리던 당시 환율이 폭등한 과정.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며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편입됐다. [자료=더밸류뉴스]
◆ 한은 독립성, 새 정부의 첫 충돌 지점
한국은행의 내부 논의가 잦아졌다는 사실은 정치와 통화정책 사이의 긴장이 커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만약 이재명 정부가 경기 부양을 이유로 금리 인하에 압박을 가한다면, 환율은 기다렸다는 듯 반응할 것이다. 반대로 한국은행이 환율 방어를 명분으로 긴축적 태도를 고수한다면 정부와의 충돌은 피하기 어렵다. 한은 출신 관계자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정권이 중앙은행을 흔든다면 환율이 경고 없이 먼저 반격할 수 있다.” 협박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시장은 권력의 언어보다 제도를 더 중시한다.
정부가 수출기업의 외화 활용 행태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권 리스크가 커질수록 기업은 달러를 쌓아두려 한다. 수출로 번 달러를 해외 법인에 남겨두거나, 국내로 들여오더라도 외화예금에 넣어 원화로 바꾸지 않는다. 기업으로서는 방어 본능이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외환시장 안정을 해치는 요인이다. 이재명 정부가 기업을 ‘동반자’로 설득할지, 아니면 ‘관리 대상’으로 규정할지에 따라 환율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에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됐다. 기업은 달러를 움켜쥐었고 정부는 사태를 뒤늦게 인식했다. 8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순식간에 1995원까지 치솟았고, 한국 사회는 혼란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 원·달러 환율 1500원은 '정치적 경계선'
지금 외환시장이 가장 예민하게 바라보는 숫자는 1500원이다. 이 선이 무너진다면 시장은 다시 ‘정권 초 환율 위기’라는 프레임을 꺼내 들 가능성이 크다. 정책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경제는 위기 국면으로 치닫게 되고, 이는 이재명 정부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부담이 된다.
환율 1500원 방어에는 현 정부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걸려 있다. IMF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지적했듯, 정책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때 환율은 과도하게 반응한다. 정부가 시장을 향해 어떤 언어를 던지는지, 어떤 정책을 강행하는지, 어떤 선을 넘는지가 실시간으로 채점되고 있다. 외환시장은 정책 찬반을 말하지 않는다. 오르거나 내리는 반응으로 표현할 뿐이다.
이재명 정부가 마주한 환율의 향방은 경제 변수보다 정치 변수에 더 달려 있다. 출범 첫해를 보내는 정부의 국정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지는 국회도, 여론조사도 아니다. 외환시장이다. 곤혹스러운 점은 이 시험에 연습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