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으로 합의된 원자력추진잠수함(이하 원잠)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한·미 병행 건조'가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한국 정부와 산업계는 기술 자립과 안보 주권을 이유로 국내 건조를 선호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한·미 병행 건조가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 한·미 조선 협력, ‘MASGA’가 불붙인 원잠 논의
'원잠 한·미 병행 건조'의 큰 그림은 필리조선소가 미국 내 잠수함 건조 인프라 부족을 보완하고 한국은 기술력과 공급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한 한·미 조선협력 프로젝트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MASGA는 미국 조선업 부활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협력 프로그램으로 한국이 핵심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대미 투자 펀드 1500억달러 중 일부를 MASGA에 배정했으며, 필리조선소에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을 단순 협력국이 아닌 조선산업의 공동 주체로 보겠다는 신호”라며 “미국의 잠수함 건조 병목을 한국의 기술로 해소하려는 의도”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화오션이 건조한 장보고-III 잠수함. [사진=한화오션]
◆ 필리조선소 인프라와 인력 확보, ‘병행 건조’의 실현성
필리조선소는 현재 상선 중심의 조선소로 잠수함 건조 경험이 없지만 한화는 약 50억달러를 투자해 연간 20척 수준의 건조 능력을 확보하고 군용 특수선 전용 블록 생산기지를 12만평 규모로 신설할 계획을 밝혔다. 기반 공사와 밀폐형 작업장은 단기간 구축이 가능하다는 평가다.
현재 미국 내 잠수함을 건조하는 조선소는 제너럴다이내믹스 일렉트릭보트(코네티컷)와 헌팅턴잉걸스 뉴포트뉴스(버지니아) 두 곳뿐이다. 두 곳 모두 포화 상태로, 미국 해군의 연간 잠수함 목표치인 3척(자국 해군용 2척·AUKUS용 1척)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리조선소가 제3의 전략 거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핵심은 인력과 기술 이전이다. 한화는 미국 현지의 숙련 인력과 퇴직 기술자를 적극 영입하고, 한화오션의 생산 및 엔지니어링 인력을 파견해 현지 전문성을 키운다는 계획이다. 한화 관계자는 “한화오션이 축적한 글로벌 공급망과 생산 노하우를 필리조선소에 이식하면 인력 부족 문제를 빠르게 해소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핵연료 취급 문제는 미국 내 철저한 원자력 규제 체계 아래 해결 가능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필리조선소 인근에는 미 해군 연구시설이 인접해 있고, 과거 해군 조선소로 운영된 경험도 있다. 미국의 원자력 관리·감독 체계는 한국보다 훨씬 엄격해 안전성 측면의 우려는 크지 않다는 평가다.
◆ 한·미 병행 건조, 기술 교류와 시장 확대의 기회
전문가들은 국내 단독 건조보다 양국 병행 건조가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한국은 자주국방 상징인 한국형 원잠(K-SSN)을 건조하고, 미국 필리조선소에서는 버지니아급 원잠을 병행함으로써 기술 교류와 시장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이다. 미국의 원자로 시스템에 한국의 모듈·블록 기술을 접목하면 기술 완성도는 높이고 리스크는 낮출 수 있다.
또, 병행 건조는 단순한 산업 협력을 넘어 동맹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리조선소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언사 이상의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된다. 미국의 조선 인프라를 한국이 보완하는 구조는 동맹의 실질적 심화이며, 한국으로서는 원잠 기술을 중심으로 한 K-방산의 확장 기회다.
경제적 파급효과도 크다. 한화오션이 수행 중인 미 해군 함정 MRO 사업에는 부산·경남 지역 16개 협력사가 참여하고 있다. 필리조선소가 버지니아급 잠수함을 수주하게 되면 국내 협력사들의 부품·설계·모듈 공급 기회가 확대돼 상생 생태계가 형성될 전망이다. 이는 한국 조선업이 상선 중심 구조에서 군수선·특수선 분야로 확장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
국내 단독 건조가 이상적이라면 한·미 병행 건조는 현실적이다. 필리조선소가 버지니아급을 맡고, 한국이 K-SSN을 건조하는 모델은 양국의 기술·시장·전략적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시킨다. 기술은 한국이, 기지는 미국이 담당하는 ‘병행 건조 모델’은 한·미 동맹의 새로운 산업적 형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마디가 향후 수십 년간 한·미 방산 협력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전략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