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선업을 대표하는 HD현대중공업(대표이사 한영석 이상균)과 한화오션(대표이사 권혁웅)이 KDDX(한국형 차기 구축함)를 둘러싸고 법적 소송과 재반박에 나서면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 그룹의 '오너 3·4세'들이 평소 '절친' 사이임에도 이같은 공방이 표면화되고 있는 배경에는 구축함으로 대표되는 특수선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이 시장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재계 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 임원 없이 기밀 유출 불가능" 고발
한화오션은 지난 4일 HD현대중공업을 군사기밀보호법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한화오션은 이례적으로 다음날 설명회까지 갖고 백그라운드 사정을 공개했다. HD현대중공업의 한국형 차기 구축함 'KDDX' 사업 군사 기밀 유출 논란에 대해 임원 간 개입이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조직적 행위라며 엄중한 수사를 촉구한 것이다.
이 사건의 출발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2018년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 현 국군방첩사령부)가 불시에 진행했던 보안 감사에서 HD현대중공업 직원의 군사기밀 유출한 사실이 있다. 당시 현대중공업 직원이 지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해군본부 함정기술처를 수차례 방문, 대우조선해양이 수행한 KDDX 개념설계 보고서 등 기밀을 내부 서버에 공유했다는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 임원의 군기밀 유출 건 개입 정황이 있다는 주장이다. 한화오션은 지난 5일 개최한 입장 설명회에서 과거 기무사나 울산지검 수사 기록, 유죄가 확정된 직원 판결문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임원 간 개입이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조직적 행위였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또 이해관계를 위해 고발한 것이 아닌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HD현대중공업은 이미 사법부 판단까지 나온 사안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HD현대중공업의 한 관계자는 "임원 개입 여부 등 한화오션이 문제 제기한 사안은 이미 사법부의 판결과 방사청의 두 차례에 걸친 심도 있는 심의를 통해 종결된 사안이다"라며 "설명회를 통해 한화오션이 발표한 내용은 정보공개법 위반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수사 기록과 판결문을 일방적으로 짜깁기해 사실관계를 크게 왜곡하고 있어 유감"이라고 밝혔다.
◆배경에는 '특수선 시장 급성장'... 한화(7위), HD현대(9위) 재계 순위에 영향
정기선(42) HD현대 부회장과 김동관(41) 한화그룹 부회장은 재계에서 '절친'으로 알려져 있다. 두 경영자는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결혼식에 초대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맺어왔다.
이렇게 보면 굳이 이 정도로 갈등을 표면화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현재 한화그룹과 HD현대그룹의 재계 순위는 '막상막하'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 이하 '공정위')의 지난해 공시대상기업집단(일명 대기업집단) 순위에서 한화그룹은 7위로 HD현대그룹(9위)보다 두 단계 앞서 있다. 그렇지만 매출액 기준으로 따져보면 HD현대그룹이 75조1150억원으로 한화그룹(71조6720억원) 보다 3조4000억원 가량 많다.
10년전만 해도(2014년) 한화그룹은 대기업집단 15위로 HD현대그룹(9위)에 한참 뒤져 있었다. 그렇지만 한화그룹이 김동관 부회장 주도로 수소·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 신사업에 나서고 누리호 발사로 대표되는 우주개발까지 나서면서 재계 순위가 점프하고 있다. 여기에다 지난해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까지 인수하면서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HD현대그룹으로서는 위기 의식을 가질 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선 시장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두 그룹의 재계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정학적 위기 고조로 전 세계에서 특수선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KDDX 사업 수주는 그 중요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향후 해외시장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이미 캐나다·폴란드·필리핀 등에서 특수선 수주 경쟁을 예고한 상태다.
재계의 한 인사는 "두 그룹은 오너간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떠나 비즈니스 주도권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KDDX 소송을 둘러싼 갈등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HD현대중공업은 자사가 국내 특수선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는 한화오션의 주장에 “국내 물량은 이지스 구축함 2·3번함 건조만 남아 있는 상황”이라며 “2번함은 내년 1월 진수식을 앞둬 내년 이후에는 3번함 1척만 남게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오히려 한화오션은 이지스함보다 훨씬 비싼 3600톤급 잠수함 3척을 건조하고 있고, 지난해 울산급 호위함 2척을 수주하며 최근 건조에 착수했다”며 한화오션의 독점 가능성을 제기했다. 한화오션 측은 "현재 HD현대중공업은 수상함 수주잔고가 13척으로 마지막 인도가 2028년인데, 한화오션은 지난해 11월 계약한 장보고-Ⅲ 배치Ⅱ 5,6번함을 포함해 단 3척뿐"이라며 경쟁사에서 주장하는 독점 여부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