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이혜지 기자
10여년전만 해도 이 그룹은 사실상 100% 내수에 기반하는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 그룹의 주력 사업인 통신과 정유는 전형적 규제 산업으로 툭하면 이런 저런 정부 규제로 편할 날이 없었다. 오너가 사법 처리되자 업계 일각에서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아무런 클레임이 들어오지 않으니 당국이 맘 편하게 진행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계를 더 돌려 그로부터 또 다시 10여년전의 이 그룹은 전형적인 정유∙섬유 기업군이었다. 정유 사업은 극단적으로 불황과 호황을 오갔고 섬유 사업은 한국 근로자들의 임금이 높아지며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룹은 경천동지(驚天動地)라고 할만한 일을 해냈다. 이제 이 그룹은 글로벌 시장 '빅3'의 첨단 반도체 기업을 거느린 '재계 2위'로 점프했다.
SK그룹(회장 최태원) 이야기다.
비결은 M&A(인수합병). 남들은 단 한 차례 성공하기도 어렵다는 '빅 M&A'를 세 차례나 연거푸 성공시키며 오늘의 성과를 이루었다.
◆2년 연속 삼성에 이어 '넘버2'… 그룹 매출액 200조 돌파
SK그룹은 올해 초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가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일명 대기업집단) 2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을 앞서며 2위로 한 단계 올랐고, 올해 순위는 지난해와 동일하다.
그룹 전체 매출액은 224조1920억원으로 처음으로 200조원을 돌파했다. 전년비 32.44% 증가했다. 순이익은 11조1000억원으로 전년비 39.69% 감소했다. 계열사는 SK하이닉스,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이상 상장사), SK E&S, SK에너지 등 198개로 전년비 12개 늘었다.
SK그룹의 이번 성과를 만든 3대 주력사는 SK이노베이션(정유), SK하이닉스(반도체), SK텔레콤(통신)으로 이들 3개사의 매출액이 그룹 전체 매출액의 절반을 넘는다(62%).
이들 3개사는 공통점이 있다. SK그룹이 M&A(인수합병)를 통해 계열사로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SK그룹이 있기까지 M&A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3개사 가운데 가장 최근 인수한 기업은 SK하이닉스(대표이사 곽노정)로 2012년 2월 SK텔레콤이 3조4000억원에 인수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난해 SK하이닉스 실적을 살펴보면 매출액 44조6216억원, 영업이익 6조8094억원, 당기순이익 2조2417억원으로 지난 한해 영업이익만으로도 이미 인수금액을 사뿐히 넘고 있다. 성공한 M&A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2012년 인수 당시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았다. 당시 반도체 업황이 좋지 않았고, 통신 정유 등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가 불분명하며, SK그룹에 반도체가 전문가가 사실상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반도체 사업의 특성상 인수 이후 조(兆) 단위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었다.
그렇지만 최태원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반도체 시장 경쟁자가 줄었다(엘피다 파산). 반도체 산업 특성상 신규 진입자가 뛰어들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게다가 하이닉스가 지금은 실적이 나쁘지만 경쟁력(기술력)은 여전히 뛰어나다."
인수 이후 SK그룹은 2012~2018년 6년 동안 약 53조원을 SK하이닉스에 투자했다. 이후의 결과는 우리가 잘 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 마이크론과 함께 '빅3'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 힘입어 2017년 SK그룹은 LG그룹을 앞서며 '재계 빅3'로 올라섰다.
◆SK하이닉스·텔레콤·이노베이션 3개사 모두 M&A로 게열사 편입
SK그룹의 이같은 'M&A를 통한 점프'는 SK하이닉스 인수 이전에도 두 차례 더 있었다.
1994년 초 SK그룹(당시 선경그룹)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 현재의 SK텔레콤이다.
SK그룹의 한국이동통신 인수에는 곡절이 있었다. SK그룹은 1991년 대한텔레콤을 설립하고 이듬해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 공모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정확히 말하면 '선정됐으나 반납했다'. 다시 말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사돈 기업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의식한 청와대 압력으로 1992년 8월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최태원 회장은 1988년 노소영씨와 결혼했다. 그렇지만 이후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1994년 1월 공개입찰을 통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 이후 제2이동통신(신세기통신)까지 인수하며 지금의 SK텔레콤이 됐다.
SK텔레콤은 국내 통신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며 해마다 조(兆) 단위의 현금을 SK그룹에 가져다주었고, 이는 SK하이닉스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줄'이 됐다.
가장 오래 전의 M&A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이다. 현재의 SK이노베이션이다.
유공 인수에 성공하며 SK그룹은 재계 10위권에서 '빅5'으로 점프하며 재계 판도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SK그룹의 유공 인수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당시 SK그룹의 유공 인수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 는 평가를 받았다. 1979년 유공은 매출액 1조원을 돌파했는데, 당시 선경그룹(현 SK그룹) 매출액은 유공의 10분 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권력 실세와 관련돼 있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유양수 전 동자부장관의 에세이집 ‘공직과 소신’을 보면 “1980년 6월 중순 모처로부터 유공 민영화 검토 제의를 받았으나 (나는) 당시 유공의 지분 50%를 소유한 걸프사 지분을 정부가 전량 인수해 국유화하는 것이 최우선책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이후 1980년 7월 하순 선경의 C회장이 장관실로 직접 찾아와 단도직입적으로 유공을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고 나와 있다.
◆최태원 회장, "M&A 성공하려면 평소 현금 충분히 확보해둬야"
현재 SK그룹의 성장 전략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AI(인공지능), 바이오, 이차전지 등의 신유망사업을 M&A 보다는 '자력'으로 키워 점프하겠다는 전략이 읽혀지고 있다.
SKC는 지난 2020년 동박사업을 하는 SK넥실리스를 출범시켰다. 바이오 사업은 SK바이오팜과 SK바이오사이언스가 맡고 있다. AI 사업은 SK텔레콤이 맡고 있다. SK텔레콤은 지난 9월 기자간담회를 갖고 2027년께 AI(인공지능) 개인 비서 2~3개를 쓰는 세상이 올 것으로 보고 여기에 대응하는 ‘AI 피라미드 전략’을 공개했다. △AI 인프라 △AIX △AI 서비스 3대 영역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한다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SK그룹이 그간의 풍부한 M&A 노하우를 바탕으로 시장에 '좋은 물건'이 나올 경우 인수해 사세를 다시 한번 점프시킬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차세대 먹거리를 '바이오'로 점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회장 장녀 최윤정씨가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지인들에게 "좋은 물건(기업) 나왔다고 자산 팔아서 인수하면 실패한다. 좋은 물건이 언제 나올 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평소 현금을 충분히 확보해둬야 한다"는 지론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회장은 ㈜SK 단일 최대주주(17.73%)이다. 최태원 회장 남동생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0.37%)과 여동생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6.58%)도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과 이혼소송 중에 있는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0.01%를 보유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 네자녀(최윤정·민정·인근·시아)는 아직 ㈜SK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고 있다.
장녀 윤정씨는 지난 2017년 SK바이오팜에 입사해 신약 승인과 글로벌 시장 진출 업무를 맡고 있다. 차녀 민정씨는 지난 2014년 해군사관후보생(OCS)으로 임관해 관심을 끌었다. SK하이닉스에 휴직계를 내고 취약계층 봉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남 인근씨는 SK E&S 전략기획팀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