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객원기자
올해 1월 초의 어느 날 저녁 미국 라스베가스의 어느 한인식당.
이 도시에서 진행중인 세계 최대 가전∙IT전시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를 출장 취재하던 기자들이 한인 식당에서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한인식당 문을 열고 말끔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안내를 받으며 들어섰다.
정기선(41) HD현대그룹 부회장이었다.
정기선 부회장은 20분 가량 기자들과 어울려 CES 현황 등을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카드를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정기선 부회장은 시종일관 정중했다는 후문이다.
이날 '이벤트'는 HD현대그룹(옛 현대중공업그룹)이 대면하고 있는 변화와 도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HD현대그룹은 대기업이면서 홍보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CEO가 사적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일도 드물었다.
그렇지만 이제 HD현대는 창업 반세기만에 대변신에 들어갔다. 그간의 성공 방정식을 '제로베이스'에서 재점검하고 조선업을 넘어 친환경 기술과 인공지능(AI) 등이 결합된 첨단 기술기업으로 변신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또, 30여년간의 전문경영인 체제를 끝내고 오너 경영 체제로 복귀한다. 정기선 부회장의 라스베가스 깜짝 이벤트는 이를 실행하는 시그널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조선·정유·산업기계 '삼박자'… 그룹 매출 '70조 클럽' 진입
HD현대는 올해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의 공시대상기업집단(일명 대기업집단) 9위를 기록했다.
2020년 대기업집단 순위가 9위로 한단계 오른 이후 순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룹 전체 매출액은 75조1150억원, 순이익 2조1580억원으로 전년비 각각 41.65%, 222.28% 증가했다. 조선업 호황으로 그룹 매출액이 처음으로 70조원대에 진입하는 등 역대급 실적을 거두었다. 계열사는 32개로 전년비 4개 감소했다.
역대급 실적의 1등 공신은 흥미롭게도 정유회사 현대오일뱅크다. 조선업황 회복과 동시에 정유 부문도 호황기를 맞은 것이다. 현대오일뱅크는 HD현대가 지난 2010년 아부다비 국제석유투자회사로부터 인수했고 현재 HD현대의 핵심 계열사이다.
현대오일뱅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국제 유가가 크게 오른 데 힘잆어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지난해 매출액은 34조9550억원이다. 그룹 전체 매출의 57%를 차지한다. 특히 영업이익은 2조7898억원으로 그룹 이익의 82%에 달한다. 작년 실적만 놓고 보면 HD현대는 석유 그룹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아 보인다.
건설기계 부문 중간 지주사인 HD현대사이트솔루션(구 현대제뉴인)의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8조5036억원과 4644억원으로 집계됐다. 각각 전년보다 62.5%와 162.7% 늘었다.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며 건설기계 부문 실적도 탄력이 붙은 모양새다.
그룹의 중추인 조선부문이 그간의 부진에서 벗어나 회복세에 접어들어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조선업 슈퍼사이클 도래... 4년치 수주 확보
HD현대의 주력사업에 해당하는 조선 부문도 양호한 실적을 냈다. HD현대의 조선부문 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은 전년 대비 11.7% 늘어난 17조30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업손실은 3556억원으로 2021년의 1조3848억원에서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특히 조선 신규수주 규모는 2020년 100억4500만달러, 2021년 211억300만 달러, 2022년 240억3500만달러 등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조선해양은 2021년과 2022년에 회사의 수주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다. 올해도 지난 9월에 연간 수주 목표치(157억4000만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HD현대의 한 임원은 "조선사의 향후 실적을 판단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수주잔고인데 현대 4년치 수주잔고가 있다. 보통 수주잔고가 3년치 쌓이면 양호하다고 판단하는 데 이 수준을 넘어섰다. 요즘에는 고객(선주)이 계약을 취소하면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이같은 실적 개선의 이면에서는 근본적인 전략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가장 상징적인 케이스가 HD현대가 100% 지분을 가진 선박자율운항 스타트업 아비커스(Avikus·대표이사 임도형)로 2020년 HD현대그룹이 60억원을 출자해 사내벤처 1호로 설립됐다. 최근 부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해상택시에 자율운항솔루션을 제공하는 등 자율운항 기술개발에 상당한 성과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아비커스는 지금까지 5차례 유상증자를 통해 340억원 가량의 자금을 확보하는 등 HD현대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정기선 부회장은 서울 강남이 있는 아비커스 사무실에 자주 들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외 환경 변화에 둔감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HD현대가 신기술 스타트업을 설립하고 적극 지원에 나서는 것 자체가 HD현대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30여년 만에 오너경영으로... 정기선 부회장 전면 등장
이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정기선 부회장이 있다. 정기선 부회장은 HD현대를 기존의 중공업 기업을 넘어 친환경 기술과 인공지능(AI) 등이 결합된 최첨단 기술기업으로 변신시키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최근 HD현대는 수소밸류체인 구축과 자율운항 기술 고도화, 스마트 건설기계 등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제시했다.
정몽준 오너의 장남인 정기선 부회장은 2021년 말 HD현대 및 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한 뒤 2년 만인 올해 부회장이 되었다. 지난 2009년 현대중공업 재무팀 대리로 입사했다 잠시 회사를 떠난 후 2013년 재입사한 지 9년 만에 부회장직에 올랐다.
업계에서는 정기선 부회장이 글로벌 조선 1위'를 굳건히 하고 조선해양·해양 에너지·산업기계 등 3대 핵심사업의 미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을 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임직원들과 격의없이 소통... 지분승계는 과제
정기선 부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격식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그룹의 사내벤처 1호 기업인 자율운항 스타트업 '아비커스 사랑'은 남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그는 지난해 이 회사 사무실에 직접 도넛을 사들고 찾아가 직원을 격려하기도 했다.
정기선 부회장의 지분 승계는 과제로 남아있다. 그룹 지주사인 HD현대의 최대주주인 정 이사장(26.6%)에 이어 2대 주주다. 지분율은 5.26%에 그친다. 그는 그 외 몇몇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가장 정상적인 지분확보 방법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에 힘입어 대통령 선거 후보로도 나올 정도로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정치인이다. 여론의 지탄을 받을 수 있는 편법적인 지분승계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세금이다. 정 이사장의 지분가치는 1조2000억~1조3000억원대로 평가받는다. 이 경우 최고세율 60%(최대주주 할증)를 적용하면 증여세는 어림잡아 7000억원대에 이른다. 수년간 나눠 낸다고 해도 상당한 부담이다. HD현대는 고배당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2024년까지 별도 기준 당기순이익 70% 이상을 배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배당액 만으로 정 부회장이 세금 부담을 충당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정기선 부회장이 언론에 크게 나왔던 것은 2020년 38세에 결혼했을 때였다.신부는 재벌가 자제가 아닌 교육자 집안 출신으로 정 부회장의 대학 후배로 알려졌다. 당시 결혼식에는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참석했다.
두 CEO는 재계에서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각자의 부친인 정몽준 이사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서울 장충초등학교 동창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자녀도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 부회장과 김 부회장 모두 지난해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