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산업부장
미국 에너지부가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향상을 위해 아스펜 에어로젤(Aspen Aerogels, 전기차 화재 발생을 억제하는 내화성 배터리 소재 제조 기업)에 9200억원 규모의 지원을 결정한 날, 도널드 트럼프는 전기차 시대의 '급제동'을 예고했다. GM, 토요타, 아우디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차세대 배터리 기술 도입을 서두르는 상황에서 벌어진 극적인 정책 반전이다. 지난 2022년 통과된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3700억달러(약 500조원) 규모의 기후·청정에너지 지원과 전기차 구매 시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세액공제로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친환경 전환을 이끌어왔다. 유럽연합과 미국 다수 주의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정책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취임 첫날부터 바이든의 핵심 정책이었던 전기차 전환 계획을 뒤엎고, '미국 에너지 효율화'란 이름으로 화석연료 시대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2030년까지 신차 판매의 50%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는 폐기되었고, 전기차 보조금 축소와 파리기후협약 탈퇴가 공식화됐다. 여기에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 부과까지 예고되면서 글로벌 자동차 산업이 요동치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정책 전환은 한국 배터리 산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배터리산업협회는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이 참여하는 '이차전지 비상대책 TF'를 구성하고 산업 경쟁력 제고와 글로벌 시장 대응 전략 마련에 착수했다.
◆미국을 다시 화석연료의 나라로...트럼프의 전기차 정책 대전환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근간을 뒤흔드는 수준이다. 미 '파이낸셜타임지'에 따르면 트럼프는 전기차 판매 의무를 폐지하고 자동차 오염 및 연비 기준을 관리하는 규제 취소를 행정부에 지시했다. 행정부 대변인은 "불공정 보조금과 다른 기술보다 전기차를 선호하는 정부가 부과한 잘못된 시장 왜곡을 없애고자 한다"고 전했다.
이 명령은 크게 다섯 가지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2030년까지 신차 판매의 50% 전기차 전환 목표 폐기, 둘째, 전기차 구매 보조금 제도 재검토, 셋째, 70억 달러 규모의 전기차 충전 인프라 지원 중단, 넷째, 캘리포니아주의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권한 박탈, 다섯째, EPA의 배기가스 규제 완화다.
트럼프는 "이러한 조치들은 미국 자동차 산업을 '완전 붕괴'로부터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듀크 니콜라스 환경대학원의 티모시 존슨(Timothy Johnson) 교수는 "많은 부분이 행정부의 의도를 나타내는 신호일 뿐, 행정부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미 천연자원보호위원회(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의 캐시 해리스(Kathy Harris)는 "기관이 규제를 폐지하려면 공개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새로운 정책 제안을 발표하고 대중의 의견을 수렴한 후 업계와 의견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포드(Ford)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전기차 지원 철폐 정책에 따른 대대적인 전략 수정을 예고했다. 포드는 완전 전기 3열 SUV 대신 하이브리드 차량 생산에 집중하고, 전기차 개발 예산을 연간 자본의 40%에서 30%로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경쟁력 있고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를 구축해 장기적인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존 롤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밝혔다. 반면 테슬라 일론 머스크 CEO는 "전기차 지원 축소는 업계 전반에 타격을 줄 수 있지만, 테슬라는 자율주행 기술력을 바탕으로 오히려 더 큰 경쟁우위를 확보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트럼프 취임 이틀째인 지난 22일까지 테슬라 주가는 3% 하락했다. 같은 기간 포드와 제너럴모터스 주가는 상승했다.
이러한 정책 변화의 핵심에는 미국의 에너지 안보와 일자리 보호가 있다. 트럼프는 "미국은 다시 한 번 제조업 국가가 될 것이며, 다른 어떤 제조업 국가도 갖지 못한 것, 즉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많은 양의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다"며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강조했다. 이는 중국의 배터리 공급망 장악에 대한 우려와 함께 미국 내 전통적인 자동차 산업 보호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주가 폭락과 실적 악화의 이중고...K-배터리 기업들의 위기
트럼프의 정책 변화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 직격탄을 날렸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4분기 2255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삼성SDI와 SK온도 각각 1740억원, 186억원의 적자 전환이 예상된다.
주식시장도 요동쳤다. 트럼프 취임일 전후 LG에너지솔루션 주가는 약 5% 하락했고, 배터리 소재 기업들도 줄줄이 하락세를 보였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1~11월 한국 배터리 3사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20%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모든 전망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로디움그룹(Rhodium Group) 케이트 라센(케이트 라센) 국제 에너지·기후 연구 책임자는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도 전기차 전환은 계속될 것"이라며 "다만 속도가 늦춰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호주 투자은행 배런조이(Barrenjoey) 글린 로콕(Glyn Lawcock) 애널리스트는 "보조금이나 혜택이 줄어들면 수요 시나리오에 차질이 생기겠지만, 궁극적으로 트럼프 하에서 조금 느려지더라도 전기차 수요는 여전히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3사를 포함한 업계 전문가들은 "내년부터 업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전기차 시대의 성패는 배터리 가격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반 승용차에 들어가는 70kWh 배터리 팩의 현재 가격은 약 8050달러(kWh당 115달러)로, 전기차 한 대 가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전문가들은 전기차의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해 배터리 가격이 kWh당 100달러 이하로 떨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블룸버그NEF는 이 목표가 내년에 달성되고 2030년에는 69달러까지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골드만삭스는 더 낙관적으로 내년에 80달러 선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친환경차 지원 축소 정책은 이러한 가격 경쟁력 확보 시점을 지연시킬 것으로 보인다.
우려되는 것은 북미 시장에서의 입지 약화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에서만 15개의 생산기지를 운영하거나 건설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북미와 캐나다를 포함해 8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3개는 가동 중이고 나머지는 건설 진행 중이다. 산업 전문가는 "공장 한 곳을 짓는 데 수조 원이 투입되는데, 전기차 수요가 예상보다 둔화되면 투자금 회수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시장의 불확실성은 중국과의 경쟁 심화로 이어질 전망이다. CATL과 BYD 등 중국 업체들은 강력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원가 경쟁력을 확보했으며, 이미 글로벌 시장 점유율 50%를 넘어섰다. 한국의 배터리 기업들은 기술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중국 업체들과의 가격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초격차 기술로 돌파구 찾는다...배터리 업계의 생존 전략 관심↑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이차전지 비상대책 TF'는 초격차 기술 확보, 원가 경쟁력 강화, 생산 효율성 향상 등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부회장은 "트럼프 2기 출범을 계기로 우리 기업의 현지 배터리 제조공장이 미국의 과도한 중국 배터리 공급망 의존을 완화하는 한편, 국방안보 및 우주항공, AI, 로봇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의 한미 배터리 협력이 더욱 강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 부회장은 지난해 12월 한국 배터리 공급업체를 확보하는 것은 중국이 주도하는 전기차 공급망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전한 바 있다.
게르노트 와그너(Gernot Wagner) 기후경제학자는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중국산에 맞설 수 있는 매력적이고 저렴한 미국산 순수 전기차는 단 하나도 없다"며 한국 기업들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부는 배터리 정책금융 확대, 수출시장 다변화 지원, R&D 예산 증대 등을 검토 중이다. 또한 ESS 시장 확대, 첨단 기술 분야로의 진출 등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도 추진하고 있다.
한국 배터리 업계는 차세대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와 리튬인산철배터리(LFP) 등 새로운 기술 개발을 통해 원가 절감과 성능 향상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또한 배터리 3사는 공동으로 리튬, 니켈 등 핵심 원자재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지만,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ESS 시장은 연간 20% 이상 성장이 예상되며, 우주항공과 국방 분야에서도 고성능 배터리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이차전지 비상대책 TF는 이러한 새로운 시장 기회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기업들의 진출을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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