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강성기 칼럼] CBAM 폭풍전야에 낀 협력사… 철강 생태계 뿌리 흔들린다

- 벼랑 끝에 선 제조 현장… 고정비·구인난에 삼중고

- 대기업 공급망 실사 압박… 협력사 배제 우려 확산

- 정부·대기업 공조 시급… 실효성 있는 상생 대책 요구돼

  • 기사등록 2026-10-06 11:00:46 | 업데이트 2026-10-06 14:08:29
기사수정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CBAM)가 재무적 의무 부과 단계로 진입하면서 국내 철강업계의 부담이 현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톤당 10만 원을 웃도는 탄소 인증서 구매 비용이 고스란히 수출 채산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대형 철강사들은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달하는 인증서 구매 비용을 줄이기 위해 탄소 저감 기술 확보와 공급망 점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강성기 칼럼] CBAM 폭풍전야에 낀 협력사… 철강 생태계 뿌리 흔들린다국내의 한 금형업체 대표가 임직원과 함께 근심어린 눈으로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CBAM)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하지만 대한민국 철강·소재 생태계의 실핏줄인 1·2차 협력사와 중간재 부품 소기업들의 현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풍경은 사뭇 참담하다. 대기업들이 커다란 우산을 펼치고 방어에 나서는 동안, 그 우산 아래서 철판을 다듬고 부품을 깎아내는 소기업들은 거대한 탄소 통계의 그물망과 복합 불황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더욱 심각한 점은 대형 철강사들이 이행하는 탄소 저감 전략이 협력사 생태계의 현실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향의 지침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데 있다.


CBAM은 EU가 역내로 수입되는 상품의 탄소 배출량을 따져 기준치를 초과할 경우, EU 안에서 만든 제품과 동등한 탄소 비용을 '인증서 구입' 방식으로 물려 환경 규제의 형평성을 맞추려는 수입 관세 제도다. 철강, 알루미늄 등을 수출할 때 제품 생산 과정의 탄소 배출량을 정확히 신고·검증받아야 하므로, 수출 기업들에게는 강력한 무역 장벽으로 작용한다.


◆ 전기료·구인난에 짓눌린 현장… "당장 내일 부도가 걱정"


문제는 이 같은 글로벌 규제 장벽을 논하기 이전에, 전국의 철강·금속 가공 부품 소기업들이 버티고 있는 일상이 이미 한계 상황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반월 시화 산단에서 상시 고용원 10명 남짓의 철판 절단·가공 소기업을 운영하는 A대표는 최근 몇 년간 급등한 산업용 전기요금 고지서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24시간 용해로를 돌리거나 대형 절단기를 가동해야 하는 업종 특성상 전기료 부담이 전년 대비 수십 퍼센트 폭등했지만, 이를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전방 수요 산업(건설·자동차) 부진으로 대형 철강사들이 감산에 들어가고 일감이 줄어들자, 원청(1차 협력사)은 오히려 "이 가격에 안 하려면 다른 데 알아본다"며 납품 단가 인하를 압박한다. 인건비와 치솟은 원부자재 가격을 맞추다 보니 차라리 공장을 멈추는 게 손해를 줄이는 길인지 갈등하는 날이 늘고 있다.


30년 가까이 정밀 기계 부품을 깎아온 B대표는 심각한 구인난에 직면해 있다. 공장 자동화를 시도하고 싶어도 수천만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스마트팩토리 구축비용은 그림의 떡이다. 젊은 내국인 구직자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고, 그나마 채용하는 외국인 근로자마저 비자 문제나 더 나은 근로 조건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탈하기 일쑤다. 숙련된 기술을 가진 고령의 베테랑 직원들이 은퇴 시점에 다다랐으나 기술을 전수할 후임이 없어,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대표 본인이 직접 16시간씩 기름때를 묻혀가며 기계 앞에 서는 날이 부지기수다. 제조 공정의 근간이 되는 숙련 기술의 단절 위기가 곧 전체 공급망의 경쟁력 약화로 직결되고 있는 셈이다.


인천의 금속 단조에서 소기업을 운영하는 C대표는 최근 공장 운영 자금을 메우기 위해 은행 문을 두드렸다가 거절당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맞물려 소기업들이 담보로 제공한 공장 부지나 건물의 감정평가액은 떨어졌고, 은행들은 제조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심사를 한층 더 까다롭게 조이고 있다. 제2금융권이나 캐피탈을 이용하자니 법정 최고 수준에 육박하는 고금리를 감당해야 한다. 어음을 받아 결제하던 거래처 중 한 곳이라도 부도가 나거나 결제가 밀리면, 당장 다음 달 직원 월급과 원자재 대금을 걱정해야 하는 '흑자 부도' 위협이 매일 목을 조여 온다.


이처럼 철강 협력사들은 폭등하는 고정비, 벼랑 끝 납품 단가, 고질적인 구인난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당장 내일의 부도 위기를 막아내야 하는 이들에게 거창한 탄소중립이나 CBAM 대응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 '탄소 장벽' 뒤에 가려진 대기업 공급망 실사의 함정


더 큰 문제는 대기업들의 공급망 실사 압박이다. EU의 제재 리스크를 안고 있는 대기업들은 협력사로부터 완벽한 탄소 배출 데이터 인증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전력 사용량조차 수기로 관리하는 영세 소기업들에게 탄소 배출량 산정(Scope 3)은 기술적 곡예에 가깝다. 공정별 에너지 사용량이나 원부자재 투입량을 체계적으로 집계할 전문 시스템은 커녕 전담 인력조차 없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일방적인 데이터 제출 요구는 또 다른 형태의 갑질로 다가온다는 것이 현장의 공통된 토로다.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협력사는 결국 공급망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탄소 무역장벽'이 대기업과 중소 협력사 간의 새로운 양극화를 부추기는 기폭제로 작용함을 뜻한다.


정부와 유관기관이 컨설팅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수억 원에 달하는 검인증 비용과 설비 교체 소요에 비하면 일회성 교육은 '언 발에 오줌 누기' 격이다. 서류상 컨설팅에 그칠 뿐, 실질적인 탄소 감축 설비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 행정적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탄소중립과 무역 규제 대응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다. 그러나 그 파고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곳은 대기업의 보고서가 아니라 이름 없는 부품 공장의 낡은 작업대 위다. 철강 협력사들이 무너진다면 그 위에서 조립되는 K-제조업의 완제품 역시 글로벌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 파국 막을 골든타임… 실효성 있는 상생 안전망 가동해야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소기업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정부와 대기업이 공동으로 나서야 할 실효성 있는 상생 지원책은 명확하다. 첫째, 영세 제조 현장에 맞는 '탄소 배출량 측정·관리 자동화 솔루션'의 무상 보급 및 간소화된 산정 가이드라인을 시급히 확립해야 한다. 둘째, 민간 검인증 기관에 의존할 때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씩 발생하는 제3자 검증 비용의 직접 보조 및 세제 혜택을 대폭 확대해 재무적 숨통을 틔워주어야 한다. 셋째, 대기업이 일방적으로 비용을 전가하는 불공정 거래 관행을 바로잡고, 공급망 내 탄소 저감 성과를 협력사와 정당하게 공유하는 '상생형 탄소감축 펀드 및 납품단가 연동제'의 실질적 작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더불어, 단기 처방을 넘어 중소 협력사들이 기초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금융 지원의 문턱을 낮추고 고용 안정망을 확충하는 종합적인 대책이 병행되어야 비로소 생태계의 연쇄 파국을 막을 수 있다.


결국 진정한 탄소중립은 거대 수출 기업의 방어막 뒤에 숨은 중소 협력사들의 기초 체력을 지켜주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이야말로 파국을 막기 위한 정교하고 입체적인 공공의 안전망 가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skk815@thevaluenews.co.kr

[저작권 ⓒ 더밸류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밸류뉴스' 구독하기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광고성 정보 수신

제휴 콘텐츠, 프로모션, 이벤트 정보 등의 광고성 정보를 수신합니다.
관련기사
TAG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6-10-06 11:00:4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더밸류뉴스TV
그 기업 궁금해? 우리가 털었어
산업더보기
더밸류뉴스 구독하기
리그테이블더보기
버핏연구소 텔레그램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