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붐이 한창이던 2000년 5월, 서점가에는 '내가 간 길은 내가 처음 간 길이었다'라는 책이 나왔다. 당시 막 태동한 IT(정보기술)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성취를 이룬 벤처 스타 21인의 성공 스토리를 소개한 책으로 변화와 혁신에 목말라하는 당시 직장인과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지금은 이들을 '벤처 1세대'라고 부른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는 김익래 다우기술 대표(현 다우키움그룹 회장),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 안철수 안철수연구소(현 안랩) 대표, 변대규 휴맥스 대표, 박병엽 팬택 대표, 조현정 비트컴퓨터 대표 등이 있다.
◆김익래 회장, 가장 성공한 '벤처 1세대' 올라
그로부터 23년이 지났다.
결과적으로 보면 김익래 회장은 이 책에 수록된 21명 가운데 수치상으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거듭났다. 김익래 회장이 오너로 있는 다우키움그룹은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3 공시대상기업집단(일명 대기업집단)' 51위를 기록했다. 전년비 4계단 점프했다. 벤처 기업인에서 당당히 재계 50대 기업집단 오너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환원의 관점에서 책에 나오는 '벤처 1세대'의 순위를 매겨보면 김익래 회장은 1위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들 벤처 1세대는 자신들이 변화와 혁신을 갈망하던 한국 사회에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은 카이스트(KAIST)에 수백억원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그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근무하다 내부 사정으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 앉아 반도체 장비 기업 미래산업을 창업해 극적으로 성공한 이야기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는 기자들이 기부를 하게 된 배경을 질문하면 언제나 비슷한 답변을 했다.
"나는 내가 쌓은 부(富)를 대물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기부한다.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정문술 회장은 실제로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노블리스 오블리주(공인의 도덕성)의 귀감으로 우리 사회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안철수 당시 안철수연구소 대표도 기부와 선행으로 교과서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대학(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 컴퓨터 백신을 만들어 무료 배포했고 이것이 인연이 돼 안정된 의사 대신에 험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 성취를 이룬 그의 인생 스토리는 신선함 그 자체였고 젊은이와 직장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적어도 정치 입문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최근에도 1500억원 기부를 발표했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기자는 그가 '벤처 1세대'로서 존경받던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이밖에 변대규 휴맥스 대표, 박병엽 팬택 대표, 조현정 비트컴퓨터 대표 등도 선행과 기부에 일가견을 보이면서 '벤처 1세대 선배'로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충실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들은 우리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여기에 부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환원에 무관심한 모습 보여, 자녀에게 부(富) 대물림도
이들 '벤처 1세대'와 비교하면 김익래 회장은 '아웃라이어'(outlier)로 불러야 할 법하다.
김익래 회장은 그간 사회환원이나 기부에 인색한 모습을 보여왔다. 연말이면 줄을 잇는 대기업들의 기부 행렬에 다우키움그룹은 이름을 올린 적이 사실상 없다. 그 흔한 연탄 나르기 행사에도 다우키움그룹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공정위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다우키움그룹은 양호한 실적을 냈다(매출액 9조6320억원, 순이익 6790억원).
김익래 회장은 자신의 부를 2세에 넘겨줄 승계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다우데이타 주식 매도 사태도 장남 김동준 부사장에게 지분을 물려주는 것과 관련 있다. 다우키움그룹의 지배구조를 살펴보면 얽히고 설켜 있는, 한마디로 1970년대의 문어발 재벌에서나 있을 법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익래 회장은 벤처 1세대이지만 자녀에게 부를 물려주고 있고, 기부나 사회환원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왔다.
다우키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키움증권 직원 보수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국내 주요 증권사들의 임직원 1인당 평균 보수를 살펴보면 메리츠증권 2억원, KB증권 1억5200만원, 미래에셋증권 1억4100만원. 키움증권 1억3500만원이다. 그러다보니 능력있는 임직원은 퇴사하고 남아있는 임원은 "회장님은 지금까지 항상 투명 경영을 해왔고 한 번도 이런 불명예가 없었다", "직을 걸겠다", "0.00001%의 가능성도 없다"를 내뱉고 있다.
김익래 회장은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다우데이타(26.66%)로부터 해마다 수십억원을 현금배당받고 있고 계열사 임원 겸직으로 또 다른 수십억원을 받고 있다. 최근 재선임된 김재식 키움증권 사외이사는 김익래 회장의 고교(경복고) 동문이다. 이렇게 전형적인 구태(舊態)를 보이는 '벤처 1세대'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605억 사회환원 발표에도 새 팩트 속속
김익래 회장이 4일 "다우데이타 주식매각대금 605억원을 사회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가 이 정도 금액을 사회 환원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1986년 다우기술 창업 이후 37년만에 처음일 것이다.
605억원의 활용방안과 관련, 다우키움측은 "아직 구체적으로 사용처가 정해지진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이 자신의 부의 활용 방안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과 차이가 있다. 정문술 회장이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를 오랜 기간 사색하고 고민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의 김익래 회장의 입장은 "위법 행위를 하지 않았다"로 요약된다. 그는 이날 "여러 의혹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로 소명하려 했으나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사퇴를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도의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기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정문술 회장이 이 장면을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를 상상해봤다.
라덕연 대표의 투자 사기와 관련된 새 팩트는 속속 나오고 있다. 주가조작단의 한 명이 김익래 회장 아들, 사위와 친분을 내세워 투자를 유인했다는 보도가 새로 나왔다. 이번 사태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공정 거래에 엄정대응하겠다"는 의지 이행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