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산업부장
대한항공은 4년만에 아시아나항공과의 극적 통합을 이뤄냈다.
지난 28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최종 승인으로 1473일간의 긴 여정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업 간 통합을 넘어 한국 항공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순간이다. 과거 고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輸送報國)'이라는 경영 이념으로 1969년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다.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는 그의 말은 오늘날에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지금의 상황이었다면, 고 조중훈 창업주도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결정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국적 항공사의 경쟁력 강화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또 다른 '수송보국'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통합 과정에서 사람들은 여러 제도적 한계를 목도했다. 그러나 유익을 공익 차원으로 돌려놓는 일은 결국 기업이 해야 할 몫이다. 다음달 20일 거래종결일 후 대한항공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항공사가 될 것이다. 이제 마일리지 통합, 조직 문화 융합, LCC 통합 등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며 진정한 통합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때다.
◆한진가 경영권 분쟁이 불러온 '운명적 통합'...마지막 퍼즐 미국 승인만 남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은 한진그룹 내 경영권 분쟁이라는 예기치 않은 계기로 시작됐다. 지난 2020년 초 KCGI를 중심으로 한 '3자연합'이 조원태 회장과 맞섰고, 산업은행은 이 과정에서 조원태 회장을 지원하며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카드로 내밀었다. 당시 아시아나항공은 12조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HDC현대산업개발과의 인수 협상도 결렬된 상태였다.
산업은행의 8000억원 투자는 한진가와 아시아나항공 모두에게 전환점이 됐다. 한진칼은 제3자 배정 방식으로 산업은행의 투자를 받아 10.7%의 지분을 확보했고, 이는 조원태 회장의 경영권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도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추가 지원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최대현 당시 산업은행 부회장은 "현 상태가 유지되면 다음해 말까지 4조원 이상의 자금이 추가로 필요하다"며 통합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대한항공은 14개국을 상대로 기나긴 기업결합 승인 절차를 밟았다. 가장 까다로웠던 EC는 유럽 4개 중복노선의 대체 항공사 선정과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부 매각을 요구했다. 대한항공은 티웨이항공에 항공기 5대와 운항승무원 100여명을 지원하며 유럽노선을 이양했고, 에어인천에는 4700억원에 화물사업을 매각하기로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EC는 마침내 최종 승인을 내렸다.
미국에서도 대한항공은 선제적으로 독과점 우려 해소에 나섰다. 에어프레미아에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 등 5개 노선 운항을 지원하고, 아시아나 화물사업도 매각하기로 했다. 업계는 미 법무부(DOJ)가 독과점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12월 20일 거래종결일까지 모든 절차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조원태 회장은 한진칼의 지분 5.78%를, 델타항공(14.90%)과 산업은행(10.58%) 등 우호세력과 함께 31.26%를 확보한 상태다. 다만 합병 완료 후 산업은행의 지분 매각 가능성은 새로운 경영권 위협 요인으로 남아있다.
◆올해 매출 18조·영업익 2조 '눈앞'...통합 시너지 기대감↑
대한항공의 실적은 이미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 16조 1180억원, 영업이익 1조 7901억원으로 코로나19 이전을 뛰어넘었다. 지난 3분기 매출액은 4조2408억원, 영업이익 6186억원을 기록하며 전년동기대비 각각 10%, 19% 증가했다. 증권가는 올해 매출 17조 9000억원, 영업이익 2조원으로 각각 11.18%, 13.40% 성장을 전망한다. 항공산업의 숙명처럼 여겨졌던 만성적 적자 구조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2010년대 초반 미국 항공업계가 보여준 성공 방정식과 같다. 지난 2010년 유나이티드항공은 콘티넨탈항공을, 델타항공은 노스웨스트항공을 인수했다. 2013년에는 아메리칸항공과 US에어웨이즈가 합병했다. '빅3'의 탄생으로 미국 항공산업은 출혈 경쟁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갖추게 됐다. 우기홍 대한항공 사장은 "아시아나항공과의 통합으로 연간 3000억~4000억원의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환승 네트워크 강화로 더 많은 슬롯을 확보하면 글로벌 항공사와의 조인트벤처가 늘어나고 환승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시아 주요 허브 공항으로서의 위상이 공고해질 전망이다. 대한항공은 이미 보잉 777-9 20대와 787-10 30대 구매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오는 2034년까지 에어버스 A350 33대와 A321 NEO 50대를 도입해 친환경 항공기를 203대로 늘릴 계획이다.
그러나 대형 항공사의 통합은 저비용항공사(LCC) 시장에 새로운 파고를 일으키고 있다. LCC 시장의 경쟁이 심화도고 있는 것이다. 진에어, 에어부산, 에어서울의 통합으로 탄생한 메가 LCC는 올해 국제선 여객 1058만명을 수송해 제주항공(714만명)과 티웨이항공(544만명)을 크게 앞섰다.
제주항공은 화물사업 확대로, 티웨이항공은 유럽 노선 취항과 오는 2027년까지 장거리 기재 20대 확충으로 맞서고 있지만, LCC 간 경쟁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마일리지·인력·LCC통합...글로벌 도약하는 메가 캐리어의 남은 과제들
대한항공이 마주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마일리지 통합이다. 기업결합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양사 마일리지 통합방안을 제출하고 공정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재 대한항공의 미사용 마일리지는 2조5278억원, 아시아나항공은 9758억원으로 합계 3조5000억원에 달한다. 시장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대한항공의 80% 수준으로 평가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1마일리지의 고객 피해도 없게 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인력 통합은 더 복잡한 방정식이다. 양사 조종사들의 기수와 급여 체계 통합이 첫 번째 난관이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노조는 이미 화물사업부 매각과 관련해 가처분 신청을 냈고, 통합계획서(PMI) 공개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통합 기업이미지(CI)와 브랜드 개발, 항공기 도색 등 시각적 정체성 확립도 서둘러야 한다.
LCC 3사의 통합도 쉽지 않은 숙제다. 부산시는 에어부산 지분 16.15%를 근거로 분리 매각과 통합 LCC 본사의 부산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통합 진에어가 제주항공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서면 여타 LCC들의 반발도 예상된다. 현재 통합 LCC의 여객 수송은 1058만명으로 제주항공(714만명)의 1.5배에 달한다.
그러나 시장의 전망은 밝다. 글로벌 항공사 시장은 지난해 5624억달러에서 오는 2033년 7727억달러로 연평균 3.23% 성장이 예상되며, 아시아 태평양은 3.67%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일 전망이다. 통합 대한항공이 세계 7위 항공사로서 이 성장의 중심에 설 수 있을지 현재의 '수송보국' 정신은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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