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경영학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동안 경영학이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기업의 본질과 목표를 살펴보기 위해 화폐와 거래, 부채와 금융, 시장과 기업, 기업 이론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심도 있게 살펴본다.
이를 통해 기업가치(주가)의 극대화를 기업의 목표로 삼는 현재 경영학의 목표 설정에는 한계가 있고,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 공헌도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은행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북부에서 탄생했다. 처음에는 은행업자들이 길거리의 벤치에 앉아 금융 거래를 했다. 벤치를 이탈리아어로 방카(Banca)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지금의 은행(Bank)이 됐다.
메디치가의 주요 비즈니스는 은행이었으며 이와 더불어 상업 활동도 수행햇다. 이슬람 제국의 향신료, 지중해 연안의 올리브 기름, 영국의 양털이 주요 거래품목이엇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은행업과 맞물려 상승 작용을 했다. 메디치가는 은행업과 상업 무역으로 얻게 된 부를 인문학과 예술분야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다.
이슬람 제국은 이미 수표, 어음, 환어음을 사용했고, 주식회사와 유사한 형태의 기업을 운영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1913년에야 설립됐다.
법인격이 명시적으로 인정된 것은 중세 교회를 통해서였다. 1250년 교황 인노체시오 4세는 교회법을 통해 법인격을 인정했다. 기독교가 이자를 제한해 자본주의의 발전을 막았다고 불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법인격을 도입해 기업을 불멸의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기초를 닦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96년까지 존재했으나 영국과의 전쟁에 패해 네덜란드 공화국의 상업이 몰락하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795년 결국 문을 닫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인도까지의 항해는 왕복에 1년 6개월 가량이 걸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각 항해를 일정기간동안 진행하는 사업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원(회계담당 사원)이었다. 그는 1653년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30명의 선원과 함께 제주도에 상륙했다. 그 뒤 14년동안 조선에서 억류 생활을 하다가 1666년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는 쓴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일종의 보고서인데, 유럽에서 발간돼 큰 인기를 끌었다. 하멜이 이 책을 쓴 이유는 14년동안 지급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주식회사는 모험심으로 무장한 상인들이 이익을 쫒아 지구 반대편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다시 말해 주식회사의 본질은 모험이다.
동인도회사는 숭고한 모험을 하는 상인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강제로 무역을 하게 하고,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 군대를 갖추었고 실제로 이용해 전쟁을 벌이며 이익을 취했다. 이익을 위해 상대의 목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이를 모험으로 미화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지고 나서 10년 후에 세계 최초의 증권시장이 네덜란드 암스텔담에 정식으로 개설됐다. 암스텔담 증권거래소는 지금의 유로넥스트로 발전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운영은 대주주와 이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일반 주주는 발언권이 사실상 없었다. 회계장부도 열람할 수 없었다.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주식을 현금으로 교환해 주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채권자가 돈을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나서, 일방적으로 돈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612년 최초로 만기가 도래한 주식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상환해주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인 네덜란드 암스텔담 증권거래소이다. 현금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얻으라는 취지이다. 도덕적 해이와 투기는 주식 시장의 원죄이다.
미국의 주식 시장의 효시는 1792년 24명의 주식 중개인들이 미 월가 근처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결의를 하면서 시작됐다. 최초로 거래된 주식은 1798년 뉴욕보험회사(New York Insurancecompany)의 주식이다.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는 1899년 대한제국 시대 고종황제의 지원으로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다. 천일은행은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철도가 깔리면 다른 산업이 발전한다. 철도가 깔리면 먼저, 물류업, 통신판매회사, 백화점 등의 소매업이 발전한다. 철로를 통해 과거에 닿지 못했던 지역에 점포를 만들고, 그 점포에 물건을 배달해주거나 철로를 통해 소비자에게 물건을 직접 배달해줄 수있을 뿐만 아니라, 광고지를 우편으로 신속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철도가 확장된 이후에야 미국 뉴욕 시민들은 비로소 신선한 쇠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철로를 통해 서부 목장에서 생산된 쇠고기가 동부로 공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석유 산업의 발전도 다른 산업을 발전시킨다.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자본주의는 왜 유럽에서 시작됐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전쟁 덕분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1550~1650년에 유럽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3분의 2 이상의 기간을 전쟁으로 보냈다. 1550년부터 1799년까지 스페인은 80% 이상을, 영국과 프랑스도 50퍼센트 이상을 외국과의 전쟁으로 보냈다. 전쟁은 권력자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를 이용해 도시는 국왕이나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 사실상 독립적으로 운영됐다. 왕이나 영주는 전쟁을 하려면 도시의 상인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야 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병력을 징집하고 세금을 거두거나 올리면 되지만 유럽은 전쟁 때문에 왕권이 강력해질 수 없었다. 이 결과 국왕과 영주는 도시에 자금을 빌리는 방안을 고안했다. 이같은 정부 부채는 훗날 중앙은행 지페로 발전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완성은 자본의 힘이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사상의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체제에서는 전통, 관습 혹은 명령이 경제를 지배하며, 전통, 관습, 혹은 명령은 정치라는 이름으로 경제에 간섭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 자체가 정체 구조를 작동시킨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성원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만 살아남는다.
1450년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 인쇄방식은 시민 의식의 확대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이는 종교개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성서를 빠르게, 또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게 했다. 이 결과 기독교의 중심이 교회에서 성서로 이동했다. 인쇄술은 도시민의 문맹률을 낮추는데 크게 기여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빠르게 공유됐다. 이 결과 16세기 이후 유럽의 과학과 학문의 발전은 산업혁명의 밑바탕이 됐다.
소득의 증대, 문맹률의 저하와 지식의 확산은 시민 의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개개인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으로 발전해 사적으로 소유한 재산은 권력자로부터 보호된다는 의식을 확산시켰다. 사적 소유권이 확립은 왕권이 취약했던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됐다. 영국의 17세기는 왕권이 의회에 굴복한 시기로,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사인들로부터 전쟁 자금을 차입하는 중앙은행 모델을 선보였다. 유럽의 이러한 변화는 현대 자본주의의 서막이었다. 사적 소유권을 바탕으로 시장이 발전하고, 이의 근저에는 화폐와 금융 시장이 존재했다. 왕이 독점한 권력을 외회와 권력을 공유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자본가와 상인의 이익을 보호하게 됐다. 개신교는 노동을 중요시하고 자본의 축적을 소명의식으로 고양시켰다.
17세기에 주식회사가 출현했고, 이를 경영하는 기법과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경영을 가르친 최초의 독립기관은 1759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있었던 아울라 두 코메르시우(Aula do Comercio)이다. 여기서는 회계와 부기를 가르쳤다.
미국 최초의 경영대학은 188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개설된 와튼 스쿨이다.
현대적 의미의 마케팅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신문에 유료광고가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주식회사에서 시행한 본격적인 마케팅은 19세기 후반으로, 이때 대중을 상대로 광고를 했고 상표를 등록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등록 상표는 1876년 영국의 베스 양조회사(Bess Brewery)의 맥주 상표로, 빨간 삼각형과 그 아래 회사명을 적어 놓었다.
1905년 미 와튼스쿨에서 최초로 마케팅 과목이 개설됐다.
회계는 유럽이 미국보다 먼저 발전했다. 19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회계사가 활동했다.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미국은 20세기 이전까지 이렇다할 회계 제도가 없었다. 미 정부는 1933년 증권법을 제정하면서 영국의 회사법을 따라 정기적으로 주주에게 회계 장부를 보고하도록 했다. 주식 중개인, 회계사, 증권분석가들에게 과실이나 고의에 따른 책임을 부과했다. 또 증권거래의 감독기구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