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진 문화평론가·출판편집자·비평연대
지난 3일 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퇴근 후 친구들과 단체 영상 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던 나는 깜짝 놀란 친구의 음성으로 비상계엄 속보를 처음 전해 들었고, 이후 쏟아지는 뉴스 속보와 유튜브 생중계 방송, 쏟아지는 유관 기사들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온통 어수선했고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들어도 전부 계엄령 이야기뿐인 밤, 나는 그저 두려움으로 새벽을 새워 보냈다. 사태가 수습되기를, 새벽이 무사히 지나 어제와 같은 내일이 오기를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소식도 모르고 10시 이전에 잠들었을 친구들이 부럽다든가, 일찍 잠든 사람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얼마나 놀라겠느냐는 농담 아닌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 보려 노력하면서. 그렇게 심상찮았던 밤을 버티고 난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지난 밤 10시 이전에 잠들지 않은 이들 중에도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접하지 못했거나 아주 늦게 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건 바로 통역과 자막의 부재로 제때 정보 전달을 받지 못했던 시청각장애인들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담화 영상에 수어 통역이나 해설 방송이 부재했을 뿐 아니라 재난문자 또한 발송되지 않았다. 하여 밤중의 소란을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야 알게 되었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사실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정보 전달의 미흡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것이다. 비상계엄의 특수한 상황을 차치한다면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현행법상 빈틈이 많은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이들의 어려움을 전혀 고려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다수의 부끄러운 사회의식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 번째 이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 역시 그날은 소란하고 떠들썩한 공포를 견디기에 바빴다. 누군가에게는 고요하고 캄캄한, 그래서 더 불안하고 두려운 밤이었다는 사실을 다음 날 기사를 접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고는 비상사태가 되어서야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 나의 좁은 세상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사는 세계에는 장애인이 없다. 나의 일상 속에서 장애인이란 최소한의 교양과 시민의식을 갖추기 위해 의무처럼 들여다보는 뉴스 활자와 영상 미디어 속에나 조금 있을 뿐이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좁은 세상을 살고 있었던 거지. 누가 손바닥으로 머리를 세차게 때린 것처럼 뒤통수가 '띵' 하고 아려 왔다. 그런데 여기서 '그걸 깨달아 봤자 내가 뭘 할 수 있느냐'는 자조적 생각이 뒤따라 들었다. 이렇게 며칠 앓다 보면 또 금세 무관심한 어른이 되어 나와 주변인들뿐인 좁은 일상을 살아가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몇 년 전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제목은 <수화 배우는 만화>. 학창 시절 청각장애를 가진 친구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십 년 넘게 품고 있다가 이를 계기로 수어를 배우게 된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일상만화다.
주인공은 어렴풋한 아쉬움과 수어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농인'에 대한 몰이해를 갖춘 보통의 '청인'이다(농인은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을, 청인은 청각장애가 없는 비장애인을 뜻하는 용어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일상 속에서 문득 고개를 내민 약간의 아쉬움과 호기심을 흘려 보내지 않고 수어 교육을 수강하는 행동력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그는 한 권의 에피소드 동안 난생처음 배우는 수어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애 쓴다. 이 과정에서 아주 대단한 성찰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무언가를 해내지 않는다는 점이 이 만화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다. 이 만화는 딱 주인공만큼의 호기심으로 수어에 접근한 독자들에게 대단한 수어 학습 노하우를 전수하거나 수어에 대한 지식을 잔뜩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냥 256쪽 내내 'ㅊ'과 'ㅋ' 지문자를 손가락으로 표현하려다 손에 쥐가 나서 끙끙대는 등, 즐겁고 쉽게 최선을 다해서 수어를 배우고 학급의 사람들과 어울릴 뿐이다.
123 사태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꾸준히 장애 이슈를 살피고 관심 갖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었다. 고등학교 시절 장애인 봉사 동아리 활동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언제나 뉴스를 찾아 읽고 목소리나 힘을 보태야 하는 일에 함께하려 애썼다. 그 행동들이 전부 부질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하지 못했던, <수화 배우는 만화>의 작가는 해냈던 한 가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 일상에 그들을 들이고, 서슴없이 어우러지는 것. 사실 이것이 가능해지는 순간 내가 몇 년간 애써 왔던 류의 관심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선 거창한 의미 두지 말고, 오프라인 공간으로 나가서 직접 만나 보자. 뭐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것 아니고, 그냥 취미 모임에 나가거나 친구들에게 모르는 친구를 소개 받듯 어울려 보자는 것이다. 수어 등 명확한 관심 분야가 있다면 저자처럼 뛰쳐나가 특강을 한번 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요즘은 온라인 강의도 꽤 열려 있지만 기왕이면 직접 나가서 배우는 게 좋을 듯하다. 거기에서 헤매고 고군분투해 배운 것만큼, 그 공간에서 만난 얼굴들만큼 내 세계는 넓어지리라.
이런 생각들을 하며 찾아본 정보 하나를 이곳에도 공유한다. 한국농아인협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각 지역별 2025년 1분기 수어 교실 개강 소식이 업로드되어 있다. 수강료 또한 없거나 아주 적은 수준이다. 책을 읽고 수어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면 내년 봄에는 가까운 지역의 수어 교실을 찾아가 저자처럼 강의를 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취미 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