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빈 문화 평론가·출판 마케터
[김정빈 문화 평론가·출판 마케터] 입사 후 받은 첫 명함. 누군가는 겨우 종이 쪼가리일 뿐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 종이에 적힌 내 이름 석 자가 이렇게나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쁘고 설렜던 기억이 난다. 직업을 가진다는 것,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를 구성원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은 신입에겐 더없이 벅차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입 마케터인 나는 입사 후 받은 명함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심지어 내 명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주어진 유니폼을 입거나 양복 차림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직종이 있는 반면, 편한 사복 차림으로 업무를 수행해도 지장이 없는 직종이 있다. 명함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직업이 사원증과 명함, 그리고 유니폼을 지급하진 않는다. 자신을 ‘일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당당하고 자부심 있게 내 할 일을 해 나가는 것. 그런 자세와 태도가 곧 유니폼이고 명함이다.
오늘 소개할 책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지음, 휴머니스트)는 인생 자체가 명함인 6070 큰언니, 큰 선배들의 진짜 ‘일’ 이야기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지금껏 살면서 이름 석 자로 불려본 기억보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로 불린 기억이 더 많다. 단순히 명함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이들의 노동을 진짜 ‘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언제나 사회가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바깥 영역에서 그림자를 자처하며 살아온 이들은 남존여비, IMF 외환위기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인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명함인 셈이다.
20년 넘게 한 자리에서 국숫집을 운영한 1954년생 손정애 씨, 가정과 직장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끊임없는 노동을 도맡아온 여성들, 농촌지역에서의 여장부들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특히 ‘세 번째 출근길―남존여비에서 페미니즘까지’에 담긴 딸들에게 전하는 순자 씨의 진심은 모든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꺼리는 적은 임금, 열악한 근무환경, 불안정한 일자리, 감염 위험, 직업을 낮잡아 보는 인식을 고령층 여성들이 감수해 온 덕에 이 사회가 유지됐다. ‘반찬값이라도 벌어야 하니까’, ‘애들한테 폐 끼치기 싫으니까’, ‘우리 집엔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라는 마음으로, 마치 집을 꾸리고 지켜온 것처럼 고령층 여성들은 이 사회를 꾸리고 지켜온 것이다.”
여성의 공헌을 인정해 주지 않는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가부장제라는 짙은 그늘 아래 굳세고 야무진 마음으로, 씩씩하고 자랑스러운 태도로 살아온 큰언니들의 이야기에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딸들이여! 엄마는 생각보다 작지 않고 약하지 않으며 누구보다 멋지고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 깨닫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