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행은 최근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미국 사법당국과 뉴욕주 금융청에 총 1천억원가량의 벌금을 내기로 합의했다. 1천억원이 기업은행으로서는 큰돈이 아닐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그동안 준법감시인의 경고도 무시해가며 사안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25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기업은행은 미국 뉴욕 남부지검와 합의서를 교환하면서 양측은 지난달 20일 8천600만달러(약 1천49억원)의 벌금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미 검찰은 기업은행 뉴욕지점에 대한 기소를 2년간 유예했다.
합의서는 기업은행과 은행 뉴욕지점이 2011∼2014년 뉴욕지점에 적절한 자금세탁 방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는 것을 '의도적으로'(willfully) 이행하지 않아 미국 법을 위반했다고 적시했다.
뉴욕지점 내 준법 감시인의 지속적인 요청과 경고에도 기업은행이 적절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자원과 인력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합의문은 설명했다.
기업은행은 2011년 2∼7월 무역업체 A사가 기업은행에 개설된 이란 중앙은행 명의 계좌에서 1조원가량을 빼내 여러 국가에 분산 송금한 정황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
기업은행에 개설된 계좌는 한국과 이란의 교역을 위해 무역 대금을 원화로 결제하는 시스템으로 당시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A사는 두바이산 대리석을 수입해 신전 건축용으로 이란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하겠다며 한국 당국에 신고했다.
이후 2011년 2∼7월 약 50차례 걸쳐 기업은행 서울 모 지점에 개설된 이란 중앙은행 명의의 대금 결제 계좌에서 모두 1조원가량을 인출했다.
이 돈은 기업은행의 뉴욕지점을 거쳐 5∼6개국에 있는 계좌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이 미국의 금융제재를 피하려고 A사를 자금 세탁에 활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첫 위장 거래는 2011년 2월에 있었으나 뉴욕지점은 5개월이 지난 그해 7월에야 해당 사실을 적발했다. 당시 뉴욕 지점이 운영한 자본세탁방지 수동 프로그램만으로는 위장 거래를 적시에 적발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뉴욕 지점의 적절하지 않은 자본세탁방지 프로그램 때문에 미국의 대(對)이란 경제 제재를 위반한 일련의 거래를 적시에 적발하지 못했다"고 합의문은 전했다.
당시 기업은행 뉴욕지점에 준법 감시팀 직원은 준법 감시인 1명이었다.
준법 감시인은 2010년 초 내부 제안서를 통해 지점 경영진에 수동 프로그램으로는 적시에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모든 거래를 다루기 어렵다고 알렸다.
그는 요청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자 2010년 5월 뉴욕 지점장에게, 2011년 1월에는 본사 경영진이 포함된 준법감시위원회에 같은 내용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준법 감시인이 2011년 7월 기업은행 본사 고위 경영진에 보낸 메모에는 '현재 자금세탁방지 모니터링 프로그램이 미국 은행보안규정(BSA)이 요구하는 검토 수준보다 8개월 뒤처져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자동 프로그램이 미비된 상황에서 인력 보강도 꾸준히 요청했다.
뉴욕지점은 이에 영어를 못 하고 준법 감시 경험이 없는 인턴 배치를 제안했다.
미국인으로 한국말을 못 하는 준법 감시인은 제안을 거절했다.
뉴욕 지점장은 결국 정보기술(IT)팀 직원을 보강했는데 이 직원 역시 영어가 능통하지 않았고 준법 감시 관련 경험도 없었다. IT를 주 업무로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형식이었다.
기업은행은 또 2011년에 위장 거래 규모를 1천만달러라고 미 재무부 해와자산통제국(OFAC)에 보고했다.
이후 한국 검찰이 2013년 해당 사건 내용을 공개하자 나머지 9억9천만달러 관련 자료를 그제야 OFAC에 제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기업은행에서 징계를 받은 사람은 없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미 금융당국과 검찰 조사에서 당시 근무 직원 면담 등이 있었다"며 "개인적으로 업무를 해태했거나 불법 행위를 했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았겠지만 그런 내용은 없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도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기업은행과 뉴욕지점이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수차례 건의에도 미온적 대처를 한 결과 1천억원대 벌금을 물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는 점에서 책임 소재를 가려 징계를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