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미술은 세상 변화와 무관한 것 같지만 미술이야말로 세상 변화를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변화시켜왔습니다. 현대인은 정교한 실사화보다는 백지에 오로지 점 하나 찍힌 그림에 더 위안을 받고 있지요. 현대 미술의 주류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건너온 배경입니다."
주말 오후 봄 날 교외의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경기 군포 이지갤러리.
금정전철역에서 5분 거리의 이 갤러리에 진행되고 있는 '내가 품은 꽃길'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작 40여개를 감상하다가 '헤아림의 꽂길'(162X130㎝)을 들여다봤다. 이 그림은 수백개의 사각형들로 채워져 있는데, 사각형마다에는 분홍색 꽃 봉우리 같은 무늬들이 '정교하게' 채워져 있다.
◆한글, 영어 기호로 우주적 추상 세계 구현
'정교하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수백개의 분홍색 꽃 봉우리 각각이 세밀한 한글∙영어 문자와 기호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 꽃봉우리 무늬가 그림 한 점에 약 3만개 들어있다. 그림 한 점을 완성하는데 꼬박 1년이 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전시회는 이지갤러리 개관기념전이다. '무지개빛 꽃길'(163x130㎝, 한지및 혼합재료), '내가품은 꽃길8'(100x90㎝,한지및 혼합재료), '헤아림의 꽃길7'(162x130㎝, 한지및 혼합재료) 등이 전시돼 있다. '헤아림의 꽃길' 안내 글을 들여다보니 '2억 2000만원'으로 소개돼 있다. 그의 명성을 보여준다.
무산 허회태가 지난달 22일 경기 군포 이지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 '헤아림의 꽃길 1, 2'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그의 화법은 이모그래피(emography)로 정의된다.
이모그래피는 감정(emotion)과 회화(graphy)의 합성어로 전통 서예와 회화를 융합한 새 장르다. 그의 이모그래피 작품은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그가 '국내 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진 현대 미술 거장'으로 불리는 배경이다.
2017년 2월 미국 CNN 방송은 'Great Big Story' 채널에서 "무산은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여유와 상념의 세계를 구현하는 장인"으로 소개했다. 이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CNN 본사 취재진은 한국을 방문해 5일 동안 무산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중 취재했다. 미국 북동부 제임스 메디슨대 5개 지역 초대순회전(2009. 9~2010.4), 스웨덴 국립박물관 초대전(2014), 슬로바키아 정부 초대전(2017), 미국 워싱 D.C 한국대사관 전(2010. 1~2010. 2) 등에서 세계인의 관심을 받아온 배경을 분석했다. FOX 방송(2018), abc 방송(2018)도 그의 작품 세계를 보도했다.
이모그래피는 '단순함'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그가 서예에서 출발해 전각, 한국화, 서양화를 거쳐 이모그래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만물의 원리는 단순함으로 귀결된다는 깨달음의 결과물이다.
"금강경은 5714 글자로 돼 있는데 이를 줄이면 반야심경 260 글자가 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 260 글자를 한 글자로 줄이면 '비울 공(空)' 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거치면 비울 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순함을 구현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산 허회태 작 '헤아림의 꽃길' 일부. [사진=더밸류뉴스]
◆번잡함 벗어난 교외에 갤러리 둥지 틀고 새 작업
그가 이같은 독창적 화풍을 창조한 출발은 서예다. 그는 서예로 출발해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대상(1995)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문자와 기호에 입체성을 부여한 이모그래피로 세계 미술계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조합예술(컴바이닝) 기법을 통해 서예와 미술을 결합했다. 무산은 붓글씨로 기호, 글자를 한지에 새기고 이를 바탕으로 입체적인 작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창작한다. 이런 독창성이 셰계인의 관심을 받는 비결이 됐다.
그는 자택(서울 방배동)에서 멀지 않으면서 서울 도심의 번잡함에서 비켜 있는 이곳에 자신의 갤러리를 개관했다. 갤러리 위층 한켠에 작업실도 있다. 수면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에 쏟고 있다.
"일상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는 셈이지요. 그림을 만들면서 창조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림 작업은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이지만 내 머릿속의 영감이 그림으로 완성되면 희열을 느낍니다."
무산 허회태가 지난달 22일 경기 군포 이지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 '내가 품은 꽃길'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무산은 유년 시절 '서예 신동'이었다. 한학에 뛰어난 백부(강헌 허영재)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그렇지만 1995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열 두차례 낙방하기도 했다. 이런 시행착오의 경험이 그를 매사에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는 원숙의 경지에 이른 지금도 수면시간 5시간을 제외한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창작에 사용하고 있다.
미국의 평론가 켄 달리(Ken Daley)는 “허회태의 작품에는 동양과 서양, 한글과 영어로 된 이원체(二元體)을 알 수 있고, 언어들이 서로 어우러져 결합되어 종이 위에 직접 쓴 철학의 조각들, 단어와 문장들의 조각들이 서로 싸여서 접힌다"며 "소용돌이치며 앞으로 돌고 나아가면서, 그의 조형 언어들은 존재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술평론가 타티아나 로젠슈타인은 생존 작가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판매된 작품(1100억) “제푸쿤스‘에 대해 평론을 했었는데 독일에서 무산의 방배동에 있는 연구실을 직접 찾아와 실제 작품을 보고 이같이 평론했다.
"감정(Emotion)과 조각(Sculpture)을 결합한 작가의 철학을 직접 붓으로 써 내려간 메시지가 담겨진 입체 조각들로 이뤄지는 작품 세계가 서예를 현대예술로 발전시켰다. 서예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예술적 자유를 탐구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붓과 융합해 추상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수공예 보석 같은 작품이다."
독일 문화예술매체 '키노앤쿤스트'(KINO&KUNST)에 소개된 무산 허회태 작품.
이번 전시 주제에 나오는 '꽃길'은 눈으로 보이는 꽃길에서 한걸음 나아간 '마음의 꽃길'을 의미한다.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적인 것이야말로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다"며 "한국의 국격이 글로벌 시장에서 높아지면서 K-아트가 세계인들에게 더 알려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시회 마감 5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