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진 문화평론가·출판편집자·비평연대
이직 후 공들여 준비한 책이 드디어 다음 달이면 세상에 나온다. 아무래도 '내 기획 작품'이라고 소속감을 느낄 만한 작품의 첫 출간이라 그런지 준비 기간 내내 마음이 심난하고 복잡하다. 무엇 하나라도 더 챙겨 넣어야 할 것 같아서 끊임없이 봤던 원고를 또 들여다보고, 체크했던 일정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말도 안 되게 일을 자꾸 벌이기도 한다. 정신을 차리니 내가 3주 넘게 단 하루도 쉰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쓰러질 것 같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정신이 번쩍 들어 우선은 '건드리고 싶은 일들'을 잠시 치워두고 10시간을 내리 잤다. 그다음엔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던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아인슈페너를 한잔 마시고, 발길이 닿는 대로 서점에 갔다. 몽글몽글한 손그림에 독특한 동양화 감성이 한 스푼 들어 있는 일상 만화. 그런데 제목은 살벌하다. 무려 k-레즈, 한국 레즈비언의 '생존기'란다.
생존기가 뭐지. '생존'을 사전에 따라 정의하면 "살아 있음. 또는 살아남음"이니, 살아 있거나 살아남은 과정을 기록한 것이 생존기(生存記)일 테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k-레즈 생존기'는 성소수자 개인의 꽤나 지난하고 치열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울한 내용으로 점철된 만화일 것만 같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생존기'에는 다른 뜻이 하나 더 있었다. 생존기(生存技). 이번에는 게임 용어다. 그것도 대개 굉장한 힘을 가진 단일 몬스터를 대상으로 여러 명이 합동 공격을 하는 RPG 게임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아주 강력한 한 방이 들이닥칠 때 이를 버티는 비장의 기술을 말한다. 생존기(生存記)일까, 생존기(生存技)일까? 제목을 보고 고민했고, 내용을 읽고 이해했다. 이 이야기는 30대 여성 레즈비언으로 대한민국을 살아 온 저자의 치열한 '생존기'인 동시에, 그만한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던 자기만의 '생존기'에 대한 이야기다.
'K-레즈 생존기', 해강 지음, 뿌리와이파리. [이미지=출판사 제공]
'평범'이란 무엇일까. "사랑, 성, 결혼, 가족에 대한 일방적인 규범과 틀"이 있는 것만 같은 대한민국은 모두가 동의하는 '평범함'을 해내기 꽤 어려운 나라다. 특히 일상 안부의 탈을 쓰고 불쑥 끼어드는 '남자친구는 왜 안 사귀어?' 따위의 질문에 속 시원히 '여자친구가 있노라' 대답하는 대신 '돈이 좋아서요' 대답해야 하는 레즈비언이라면 더더욱. 저자에게 한국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순간들은 '매분, 매초 내가 정상 범주에서 조금 빗겨난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는' 것과도 같다. 여자친구와 나란히 수강한 수업에서는 수업 외의 주제로 대화가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레즈비언 커플인 것을 숨겨야 하고, 길을 걸을 때 누가 볼까 싶어 다른 이성애 커플들처럼 스킨십하지 못하다가도, 집 앞에서 용기 낸 스킨십을 아버지가 봤을 때 의외로 '돈독한 친구 사이일 것'이라는 편견에 아웃팅을 당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하루하루들.
그러나 이토록 요상한 '생존기' 속에서, 저자는 흔들리는 대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맞잡는다. 두 마리 고양이와 여자친구, 그리고 친구들. 시시때때로 보이지 않는 손이 '성 소수자'나 '퀴어' 따위의 말들로 나를 평범하지 '못하게' 만들고, 좀 더 깊이는 30대 여성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으로 살며 맞닥뜨리는 여러 난제들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 가운데 결국 지켜야 할 것은 내 곁에서 서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인생과 얼굴에 어떤 주름을 가졌든, 각자 삶의 모습이 어떻든, 이 사회에서 모두 풍요롭고 행복하고 반짝이는 LGBTQ로 늙어 가길. 그리고 서로의 일상 속에서 안전하고 아늑하게 자리 잡길."
그러니 결국 저자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성 소수자로 살아내면서도, 성 '소수자'라는 타이틀이 멋대로 자신을 평범의 바깥에 세우는 것에 반대하며, 행복을 좇는 평범한 개인으로서 살아가겠노라고 선언한다. 주변 사람들도, 만화를 감상하는 누구도, 성 소수자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 똑같이 "풍요롭고 행복하고 반짝이는" 삶을 살기를 바래준다. 이 바람은 평범을 멋대로 규정하는 답답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저자의 '생존기'이며, 그렇게 완성된 'K-레즈 생존기'는 결코 음울하거나 어둡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고 유쾌하다.
우리에게도 저마다 '평범하지 못할' 이유들이 있다. 악의 없이 무구한 질문 폭격에서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얼마 없다는 것을 안다. 거기에 쫓기다 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내 삶의 큰 줄기가 눈에 안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조급증을 느껴 내 바람과 여건을 외부의 시선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다. "아, 세상 살기 참 뭣 같네!" 큰소리를 치고 싶은, 가끔은 "원래 이렇게 사는 게 빡센(힘든)가? 나만 그런 거야?" 묻고 싶은 일들이 사람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잘게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결국 내 곁의 사랑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들의 얼굴 얼굴이 우리에게 있어 저자의 것과 같은 '생존기(生存技)'가 되어줄 것이다.
박소진 문화평론가·출판편집자·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