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진 문화평론가·출판편집자·비평연대
"복수할 것이다. 교정의 제단에 교정된 피와 해골을 바칠 것이다. 시발…… 복수한다……."
편집자로서 통쾌한 책이 나왔다. 그간 편집자로 일하며 느낀 온갖 설움에 공감할 뿐 아니라 시원하게 대신 욕도 해 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며 통쾌할 만한 편집자는 못 된다. 교정과 교열, 그중에서도 “오자 따위를 바르게 고침”이라고 정의된 전자의 행위에서 신들린 정확도를 뽐내는 다른 편집자들과 달리 나는 이 분야에 조금 약한 편집자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나에게 6시 퇴근 후 회사 정문을 나서는 순간은 그야말로 해방의 시간이다. 하루 종일 ‘ON’ 되어 있던 편집자 모드를 딸깍, ‘OFF’로 돌려놓고 내 마음대로 온갖 은어와 신조어와 틀린 맞춤법과 한국어 표현을 구사해도 되는 일탈의 순간을 짧게 누린다. 그래 봤자 겨우 서너 시간일 뿐이지만. 종종 다른 편집자들이 (조금은 느슨해져도 되는 순간, 이를테면 같이 FPS 게임을 하는 순간에도) 기계처럼 정돈된 한국어를,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내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경지 같은 것을 느끼고는 한다.
같은 편집자지만 우리는 같지 않다. <교정의 요정>에는 전반적으로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굳이 대체할 필요도 없이 어차피 헐값"인 교정 일에 대한 짙은 애정과 집착과 자부심이 깔려 있다. 그와 반대로 나의 내면에 '교정공의 자부심‘은 없는 듯하다. 그러니 표현을 조금 바꾸도록 할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니, 이 책을 읽고 통쾌함을 느낀 이유를 굳이 ‘편집자’로 좁히지 않아도 될것 같다.
"김OO 씨, 이거 왜 이렇게 해 놨어?" 어느 날, 부장이 물었다. 울그락불그락해진 그 표정은 얼핏 날 업신여기거나 한심해하는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아무런 심리적 제약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마구 발산하며 상사가 나를 나무랐다. 그러고 나서 몇 분이나 혼난 부분을 다시 체크했는데, 아무리 살펴도 틀린 건 내가 아니라 부장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네가 틀렸고 내가 맞았다’는 말을 어떻게 상대방 기분 상하지 않게 잘 포장해서, 조심스럽게 전할 수 있는지를. 이것은 누가 맞고 틀렸느냐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부장 말마따나) 업무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그래, 필요한 과정인데…. 왜 이렇게 말을 하는 게 어렵지?
몇 분간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수 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린 끝에 온갖 쿠션어로 치장한 ‘내가 맞고 네가 틀려’를 부장에게 전달한다. 성숙한 인품의 상사라면 다행이나 그럴 때 대체로 돌아오는 것은 언짢은 심기를 표출하려는 불퉁한 표정과 제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말 돌리기 스킬, 최악의 경우 긁힌 자존심을 무마하려는 히스테릭한 말과 행동들이다. 심지어는 조마조마하며 의견을 전달한 보람도 없이 ‘팩트’는 정정되지 않는다. 이 순간 되려 꾸지람을 들은 나의 기분을 무어라고 정의해야 할까. 분노, 허탈함, 황당함… 그사이 고개를 치켜드는 초라함. <교정의 요정>에도 이러한 경험이 등장한다. 저자는 편집 일을 하며 만난 수많은 “끼새수교”(거꾸로 해보라)들의 만행과 자신의 울분을 쏟아내며 글을 시작한다.
<교정의 요정>은 울퉁불퉁한 글을 교정보다가 미쳐 가는(?) 편집자들의 이야기다. 동시에 억울해 본 적 있는, 분노해 본 적 있는 직장 내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경력이 낮아서, 임금이 낮아서, 더 하청 업체의 담당자여서, 고객을 접대하는 위치여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뻔한 표현이나) '을'이 된 사람들의 목소리는 마땅한 이유도 없이 작아지기도 한다. 가끔은 ‘수퍼 갑’인 상대방의 잘못된 감정이나 언행을 마치 자연재해처럼 감내해야 하는 순간들도 온다. 이를테면 '로서'와 '로써'를 본인이 틀려 놓고도 당당하게 편집자를 구박해 온 <교정의 요정> 속 수많은 끼새수교들을 상대할 때처럼 말이다.
틀려도 당당한 자들에게, 옳은 소리를 하면서도 '내 올바름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쩔쩔매야 하는 초라함을 비단 편집자들만 느껴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를 고혈압으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인 “끼새수교”들에 모 부장, 본사의 담당자, 상위 거래처의 과장, 고객… 그 외 어떤 주어를 가져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그렇게 저자의 에피소드를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서 십분 공감하며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덧 직장 상사 내지는 고객 뒷담화 시간은 끝나고 다른 주제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갖가지 이야기들이 신기하게도 '맞춤법' 이야기와 맞물리며 스쳐 지나간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고개 끄덕이며 전부 다 읽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리 X 같아도 결국 내일도 출근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뿐인데, 어쩐지 그 기분이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을 조금 더 발견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