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가 갑자기 25%로 뛰었다. 바이어는 나 몰라라 하고, 물건은 항구에 묶여 창고료만 축내고 있다. 믿었던 보험은 “불가항력이 아니니 보상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대체 누굴 믿고 수출해야 하는가?
지난해 트럼프발 관세 전쟁이 수출 전선을 덮쳤을 때, 수출입 기업들이 쏟아낸 절규다. 수출 7000억 달러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거머쥐었지만, 정작 현장 기업들의 등 뒤는 서늘하다.
관세 폭탄은 바이어의 변심과 신용 급락으로 이어졌고, 은행은 리스크를 이유로 대출 창구를 닫았다. 최후의 보루여야 할 '무역보험' 마저 약관을 이유로 등 돌린 순간, 기업들은 거대한 파도 앞에 맨몸으로 버려졌다.
현재의 시스템은 느리고 수동적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산하 준정부기관인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이제 '사후 처리반'을 넘어, 기업의 수익을 사수하는 ‘전략적 무기’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 한국의 무역보험...위기 때마다 풀리는 '느슨한 안전벨트'
지난해 한국의 수출이 역대 최초로 7000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많은 수출기업들이 전례없는 관세 암초를 만나 신음하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무역보험은 수출 기업이 대금을 회수하지 못하거나 예기치 못한 대외 변수로 손실을 입을 때 이를 보전해 주는 제도다. 기업이 과감하게 신시장을 개척할 수 있도록 신용을 뒷받침하는 '수출의 안전벨트'와 같다. 하지만 지난해 트럼프발 관세 쇼크 당시, 이 방파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무역보험 인수실적 비중 80% 이상인 '단기수출보험'의 무력함이 드러났다. 선적 후 대금을 받을 때까지 신용·비상위험으로부터 대금을 지켜주는 안전장치지만, 관세 전쟁 같은 실제 위기 앞에서 제대로 작동되기 어려웠다. 관세 인상에 따른 수익성 저하로 바이어가 수취를 거부하더라도 '상업적 분쟁(Commercial Dispute)'으로 분류돼 보상이 거절될 수도 있다.
실제로 기아는 지난해 3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미국 관세의 25% 적용으로 1조2340억원 이익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결국 기업들은 보험료를 내고도 관세 장벽 앞에 방치된 셈이다.
한국무역협회(KITA)가 지난해 4월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수출 제조기업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 2기 이후 글로벌 공급망 조달 여건 악화를 우려했다. 특히 중견기업(55.1%)과 중소기업(53.5%)의 우려는 대기업(36.8%)을 크게 웃돌며, 중소기업의 55.8%는 적절한 대응책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업종별로는 2차전지, 전기차, 철강, 기계 등 첨단과 전통 제조업 전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업들은 원자재 조달비용 상승과 수급 불확실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특히 미국의 무역제재에 대한 공급망 위기 우려(79.6%)는 중국의 원자재 수출통제 우려(42.4%)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이는 미국의 전방위적 제재 확대가 수출 전반을 흔드는 핵심 변수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위기에 대응하고자 지난해 4월 한국수출입은행은 6조원 규모의 ‘위기대응특별프로그램’을 가동했지만, 지난해 8월 말 기준 집행 금액은 1조5600억원으로 26%에 불과했다. 기업들은 실질적인 위험 인수를 원했지만, 정책 금융은 여전히 보수적인 지원 수준에 머물렀다.
◆ ‘무늬만 민간 개방’의 한계…결국 정부가 답이다
최근 5년간 한국의 수출액 및 수입액 변동 추이. [이미지=더밸류뉴스]
지난 2016년 정부는 무역보험공사가 독점하던 무역보험 시장을 민간에 일부 개방하며 '민관 협동'의 시동을 걸었다. 민간 업체의 최소 시장점유율 40% 유지가 목표였다. AIG손해보험, KB손해보험 등이 단기수출보험 시장에 선제적으로 상품을 출시하며 뛰어들었다.
다만 현실은 냉혹했다. 무역보험은 본질적으로 천문학적인 리스크를 동반하며, 마진이 거의 없는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 수익성이 우선인 민간 보험사가 글로벌 관세 쇼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민간 참여 비중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결국 핵심은 '누가 하느냐'가 아니라 '정부가 얼마나 강력하게 주도하느냐'다. 이를 증명하듯 정부는 2026년 무역보험기금 출연액을 전년 대비 약 7.5배인 6005억원으로 파격 증액했다. 전체 통상·수출 예산 역시 전년 대비 7013억원 늘어난 1조7353억원으로 편성됐다. 또 마스가(MASGA) 등 대미 투자 지원을 위한 정책 금융 패키지와 관세 피해 기업을 위한 ‘긴급 바우처’는 무역보험이 보증을 넘어 통상 협력의 전략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산업부 주도 '빅데이터 활용 보험' 개발 시급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산업통상부 산하 공공기관 업무보고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산업통상부]
무역보험공사의 '정책적 독점'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정부의 책임이 막중함을 뜻한다. 공공기관 특유의 보수성은 고위험 금융 상품 개발을 주저하게 만든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무역보험의 역할을 단순한 보험이나 보증을 넘어 다른 금융기관, 역량 있는 주요 기업과 연계해 새로운 형태의 금융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무역보험공사는 지난 12일 '산업통상부 공공기관 업무보고'에서 △대미 투자 및 공급망 대응 49조원 중장기 금융 지원 △신흥국 수출 지원 66조원 확대 △AI·방산 등 전략 산업 CEO 마케팅 및 현지화 지원 등 5대 과제를 발표하며 체질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는 산업부가 직접 나서서 수입자 신용 데이터를 전략적으로 가공하고 개방해야 한다. 민간에 리스크를 떠넘기는 대신, 빅데이터를 활용해 '관세 전쟁 특화 보험'이나 '공급망 재편 보증' 같은 고난도 상품 설계를 진두지휘해야 한다. 이것이 무역보험공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자 혁신의 길이다.
◆ 영국·독일·일본 등의 ‘공격적 방어’ 배워야
2025년 종목별 무역보험 인수실적. 출처: 한국무역보험공사. [이미지=더밸류뉴스]
글로벌 수출 강국들은 이미 보험을 영토 확장을 위한 ‘금융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영국 수출금융청(UKEF)은 ‘금융 플랫폼'으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시중 대형 은행부터 챌린저 뱅크(Challenger Bank)까지 아우르는 파트너십으로 은행이 기업에 수출 대출이나 보증(Bond)을 제공할 때 100% 보증을 서며 자금을 공급한다. 또 전문 보험 중개인(Broker)이 수출 기업에 최적화된 보험 상품을 제안하면, UKEF가 보험료의 15%를 중개 수수료로 지급하며 민간의 참여를 독려한다.
독일 무역보험기관 율러 헤르메스(Euler Hermes)는 민관협력(PPP) 모델의 정점이다. 지난 2022년 브랜드명을 알리안츠 트레이드(Allianz Trade)로 변경한 이후에도 정부로부터 공적 수출보험(Hermes Cover) 업무를 독점 위탁받아 운영한다. 이는 민간의 정교한 리스크 분석력을 공적 보증 시스템에 이식해 언더라이팅 역량을 수출 경쟁력으로 치환한 사례다.
일본의 무역보험 전담 기관인 NEXI(Nippon Export and Investment Insurance)는 지난 2017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며 관료적 보수성을 탈피했다. 단순 지원을 넘어 일본 기업의 해외 현지 투자 시 발생하는 중장기 리스크까지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를 확립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약관에 없다"며 위험을 회피하는 수동적 태도에 머물러 있다. 7000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출 시대를 지속하려면, 국내 무역보험도 국가적 차원에서 리스크를 설계하고 민간의 참여를 이끄는 '글로벌 리스크 컨트롤 타워'로 진화해야 한다.
국내 수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가 무역보험 체질 개선에 직접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리스크를 민간에 분산하려는 단편적 시도는 이미 역부족임이 증명됐다.
무역보험공사 관계자는 "2026년은 공사가 대한민국 수출 1조 달러 시대를 여는 금융 컨트롤 타워로 도약하는 해가 될 것"이라며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현장 중심의 빈틈없는 무역보험 지원을 통해 글로벌 통상위기를 돌파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제 무역보험은 ‘공격적 금융 자산’이어야 한다. 정부가 벽을 허물고 파격적인 상품 설계를 주도하는 구조적 전환이 없다면, 7000억 달러의 성과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에 불과함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