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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윤진기 교수]

1조 원짜리 석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이 있다면 일반 사람들은 매우 놀랄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도 아니고 석사학위 논문이 어떻게 1조 원이나 될 수 있느냐고 반신반의하면서 그게 도대체 어떤 논문이냐고, 더 나아가 진짜로 있는 이야기인가 하고 물어볼 것이다. 학력이 인플레 되고 세상에 정보가 넘쳐나면서 사람들은 지식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다.

 

◆ 미국 랜드연구소, 500만달러 보고서 생산


인문사회 분야에서 지금까지 필자가 알고 있는 가장 비싼 연구보고서는 미국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가 6.25 당시 중국의 태도를 예측하기 위하여 작성한 보고서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랜드연구소는 이 보고서를 당시 최신 전투기 한 대를 살 수 있는 금액에 상당하는 500만 달러에 미국의 대중정책연구소에 넘겼다.(자세한 것은 汪中求 저, 허유영 역, 작지만 강력한 디테일의 힘, 올림, 2016, 206면 참조) 


2016년 우리 공군 노후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한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서 선정된 F-35의 가격이 당시 대당 1억 달러(대략 1173억 원)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그 보고서는 지금 가치로는 대략 1천억 원짜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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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원짜리 석사학위 논문은 대략 그 전투기 10대 값에 해당한다. 이 논문을 쓴 사람은 뉴질랜드의 Richard Chandler이다. 그는 1982년 Auckland 대학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논문이 '뉴질랜드 상장회사 기업지배구조의 실제(Corporate Directorship Practices* in New Zealand Listed Public Companies)'였다. 그의 결론은 지배구조가 좋지 않은 회사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회사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을 제출하고 그의 동생과 함께 자산운용사 ‘Sovereign Global Investment’를 설립했다.

 

그는 신흥시장에 뛰어들어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을 찾아내 주식을 대거 사들인 뒤 보유지분의 힘을 빌려 지배구조 개선을 시도했다. 지배구조가 정상적인 수준에 도달하면 투자자들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주식은 오르게 된다. 2003년 한국의 SK(주)에 대한 투자는 자신의 논문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준 가장 좋은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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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SK글로벌이 1조5817억 원대 분식회계를 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해외 법인과의 거래대금을 조작하여 자산과 이익을 부풀리는 방법을 썼다. SK글로벌은 제품·원자재 등을 구매하면서 물건을 받고나서 대금을 치르지 않은 외상매입금을 장부에서 누락시켰는데, 이 액수가 1조 원이 넘었다. 해외 법인이 손실을 입었는데도 이를 반영하지 않았으며, 가짜 매출채권을 버젓이 회계장부에 기입해 넣었다. SK(주)는 SK글로벌의 모회사였기 때문에 주가가 1만3천 원에서 6천 원 언저리로 폭락하였다.

 

이를 틈타 소버린(Sovereign Global Investment)은 SK의 주식 1902만800주(14.99% 혹자는 14.82%라고 한다)를 사들여 2대 주주로 올랐다. 총 1768억 원의 돈이 들어갔다. 이후 최태원 회장 퇴진을 비롯,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SK는 백기사 모집 등 경영권 방어에 1조원 가까운 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다. 소버린은 2년 3개월 후 주식을 매도하여 거의 1조 원(9359억 원, 시세차익 7558억, 배당 485억, 환차익 1316억 포함, 세금 제외)을 벌었다.


◆ 한국에도 100만달러 짜리 보고서 나와야

 

리처드 챈들러(Richard Chandler)가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이러한 성공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SK(주)의 주식을 팔고 고향 뉴질랜드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뉴질랜드 최고의 부자가 되어 있었다. 당시 '더 뉴질랜드 헤럴드'(The New Zealand Herald)는 “형제가 부자 명단에서 최고의 거물들을 제압하다(Brothers knock magnates from top of rich list)”라는 기사를 실어서 그들의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그때가 2005년 7월 22일이었다. 이 날은 뉴질랜드에서는 좋은 날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슬픈 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멋진 논문이 많이 나와야 한다. 국가를 떠나서 보면 논문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석사학위 논문이라고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신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이공 분야에서 찾아보면 이런 정도의 논문은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윤진기 경남대 법대 교수]


*이 글의 원문은 버핏연구소 윤진기 교수 칼럼 경제와 숫자이야기’ 2018.07.16. 자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mentorfora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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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7-16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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