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의 공개매수 이후 부채 비율은 별도 기준 약 82.7%이고 1조5000억원 이상의 총 현금이 남아 있을 것이다. 고려아연은 견조한 영업 실적을 바탕으로 2030년까지 차입금을 전부 상환할 계획이다."
자사주 공개매수에 2조7000억원을 쏟아부으면 재무 불안정이 초래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자 고려아연(회장 최윤범)이 그렇지 않을 거라며 배포한 보도자료 요지다.
고려아연이 지난 4일 제출한 공개매수신고서에 따르면 자사주 공개매수에 사용하는 자금은 총 2조6635억원이다. 영풍∙MBK 추산에 따르면 이를 위해 단기 회사채 1조원, 금융 기관 한도 대출 약 1조7000억원이 조달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자금 조달에 따른 연 이자비용은 1600억원이고 이는 자기자본의 28%에 달한다. 이같은 지적이 제기되자 고려아연은 자사주 공개매수를 진행해도 문제 없다고 밝힌 것이다.
◆조(兆) 단위 현금 소진하며 자사주 매입∙소각 유례없어
이번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는 그간의 자사주 매수와는 규모와 성격이 다르다. 그간의 자사주 매수는 기업이 이익을 내면 이 가운데 일부를 자사주로 매입하고 소각해 주당순이익(EPS)을 증가시켜 기존 주주의 가치를 높이는 방식이었다. 삼성전자 임원들은 주가가 하락하면 자기 돈으로 자사주를 매입했고 이는 주식시장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애플도 지속적으로 자사주를 매입하고 일정량을 소각하면서 애플 주가를 끌어올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자사주 매입에 투입하는 규모는 순이익의 5% 미만이고 금액으로는 많아야 수백억원대였다.
그렇지만 고려아연의 이번 자사주 공개매수는 금액이 조(兆) 단위이고 이를 위해 고금리 단기 부채까지 끌어다 쓴다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이익의 일부로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5년 고려아연 연평균 당기순이익(6700억원)의 약 4.5배를 허공에 '태우는' 것이 요지다(이하 K-IFRS 연결 기준). 이런 케이스는 한국 재계 70여년 역사를 통틀어 없었다.
고려아연의 이번 자사주 매입이 실제로 실행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고려아연이 보도자료 배포를 통해 반박한 내용은 틀리지 않다. 자사주 공개매수를 실행하더라도 고려아연의 부채비율은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100% 미만이고 2030년까지 차입금 상환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 반박에는 빠진 내용이 있다. 자사주 매입을 실행하고 나면 고려아연은 더이상 '탁월한 기업'으로 평가받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고려아연은 워렌 버핏이 관심을 가질만한 '고(高) ROE(자기자본이익률) 우량 기업' 시대를 마감하고 '그저 그런 기업군(群)'으로 강등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익성 낮아지며 '탁월한 기업'에서 '그저 그런 기업'으로↓
가장 큰 이유는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가 예정대로 실행될 경우 고려아연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자사주 공개매수가 실제로 실행되면 고려아연의 내년 추정 ROE는 5.40%로 예상되고 이는 한국 주식시장의 제조기업 평균 ROE(6.0%)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 추정치는 고려아연의 내년 실적 전망치에 연 이자비용 1600억원을 반영해 단순 추산한 것이다. 이번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기 이전의 증권가 컨센서스를 종합하면 고려아연은 내년 매출액 12조원, 영업이익 1조원, 당기순이익 6500억원 가량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ROE는 순이익을 자기자본(자본총계)으로 나눈 값으로 기업 수익성을 파악하는 최종 지표이다. 수익성 지표로 잘 알려진 영업이익률(영업이익/매출액)도 ROE 구성 요소의 하나이다. ROE가 지속적으로 두 자리수를 넘으면 워렌 버핏이 말하는 '탁월한 기업'으로 분류된다.
국내 1위 기업 삼성전자의 최근 5년(2019~2023) 연평균 ROE는 10.76%이다. 기업은 '사이즈'가 커질 수록 수익성이 둔해지는데 삼성전자는 대기업이면서도 순발력을 발휘해 ROE 두 자리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탁월한 기업으로 평가받는 배경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쇼크로 수익성이 극도로 저조했는데 이때 ROE가 4%대였다(4.15%). 한국의 주요 상장사의 지난해 ROE를 살펴보면 현대차 9.30%, 삼성바이오로직스 23.21%, KT&G 9.76% 등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반도체 쇼크로 ROE가 -15.61%였지만 올해 26.57%가 예상되고 있다.
고려아연도 'ROE 두 자리수'를 기록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려아연은 2019년 이전까지만 해도 ROE 10% 안팎을 유지하며 탁월한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업현금흐름(cash flow from operating activities)이 당기순이익보다 많고, 부산물로 고부가가치의 은(silver)을 생산하는 '한국 주식시장의 숨은 진주'가 당시 고려아연이었다.
고려아연의 ROE가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이 회사가 최윤범 대표 체제로 전환한 2019년이 분기점이었다. 최윤범 회장은 원아시아펀드에 투자해 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려아연 재무제표의 금융비용(2023년 770억원, 2022년 1665억원, 2021년 1733억원)을 증가시켰다. 비용이 증가하면 당연히 수익성이 낮아진다(ROE가 낮아진다).
미국 전자폐기물 처리기업 이그니오 홀딩스(igneo holdings. 이하 '이그니오') 인수비용도 고려아연 수익성을 갉아먹는 원인이 됐다. 고려아연은 2022년 미국 종속법인 페달포인트(PedalPoint LLC)를 통해 현지 이그니오를 4억4042만달러(약 5800억원)에 인수했다. 이는 2022년 고려아연 재무제표에 영업권(goodwill. 3233억원)을 발생시켰다.
회계에서의 영업권이란 A기업이 B기업을 공정가치(시가)보다 더 지불한 대가를 말하며 금액이 클수록 비싸게 샀다는 의미이다. 영업권은 해마다 상각되고 이는 고스란히 비용(expense)이다. 고려아연이 이그니오 기업가치를 과대평가했다는 지적은 여러 차례 제기돼왔다. 고려아연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그니오 모기업 페달포인트는 2022년 당기순손실 281억원을 기록했다.
◆자사주 매입 실행되면 1대주주와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너
뭐니뭐니해도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가 실제로 진행될 경우의 가장 큰 문제는 1대주주(영풍∙MBK파트너스)와의 '갈등 코스트'(conflict cost)가 커진다는 점이다. 고려아연은 1대주주가 반대하는 자사주 공개매수를 진행함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진작에 그 강을 건넜는지도 모른다). 이 결과 고려아연이 부담해야 하는 리스크와 손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현금 소진, 투자 재원 고갈, 부채 증가 등은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고려아연은 한국 재계에서 드물게 동업 정신을 유지하면서 성장해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영풍그룹 지배구조를 살펴보면 장씨 지분과 최씨 지분이 얼키고 설켜 있어 일거에 분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번 자사주 공개매수가 어떻게 막을 내리느냐와는 무관하게 고려아연 1대주주가 영풍∙MBK파트너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최윤범 회장측은 영풍∙MBK와 분리될 수 없으니 어차피 같이 가야 한다. 그런데 현재 최윤범 회장측은 LG그룹의 '아름다운 이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21일로 예정된 영풍∙MBK의 2차 가처분 신청 결과가 기각으로 나온다면(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가 허용된다면) 한국 재계의 '탁월한 기업'이자 '한국 주식시장의 숨은 진주' 한 곳이 소멸되는 것을 목격하는 시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이 수년치 당기순이익을 자사주 매입으로 태워도 된다는 것을 허용하는 판결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