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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이민주 기자]

서울 한복판이면서도 조용하고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주는 종로구 종계종 총무원. 이곳에서 머리를 식히다 도로 건너편 인사동으로 눈길을 돌리면 울긋불긋 단청 무늬로 단장한 한옥을 마주하게 된다. '서울 우정총국'이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 [사진=더밸류뉴스]

이제 우정총국은 행인들의 관심권에도 벗어나있다. "조선의 근대적인 우편업무를 시행한 관청이었으며~"로 시작되는 설명을 꼼꼼하게 읽는 이도 많지 않다.  


그렇지만 지금으로부터 137년전(1884년) 10월 17일 오후, 이곳에서는 칼과 피가 난무하고 고관대작의 목이 날아가고, 국왕(고종)이 황급히 피신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개화 사상가 김옥균(1851~1894)이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그것이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으로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모여든 이날 김옥균은 미리 교감을 쌓아온 일본 공사관에게 "거사를 벌일 것이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했고, 동지 서재필에게도 병력 동원을 요청했다. 갑자기 북쪽 건물에서 불이 났고, 건물 바깥으로 피신한 참가자들을 맞이한 것은 개화파 군인들이었다. 개화파 군인들은 수구파들의 목을 베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사진=더밸류뉴스]

우정총국이 아수라장이 되자 김옥균은 고종에게 달려가 왕비 민씨 등을 모시고 경우궁으로 이동했고, 왕명으로 입궐한 척사파와 수구파를 다시 처단했다. 그리고 청에 대한 조공 폐지, 능력에 의한 인재 등용, 조세 개혁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정강 14개조를 발표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개혁은 언뜻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 정변은 청나라가 군대를 동원하고, 김옥균에게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이 발을 빼면서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조선의 민씨 정권 전복 시도를 했고, 이 소식을 접한 고종과 민씨는 일본에 자객을 보내고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일본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 김옥균은 청나라 실세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다가, 그곳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됐다. 김옥균의 시신은 서울로 보내져 양화진(서울 합정동)에서 능지처참된 후 조각내져 전국의 저자거리에 효시됐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김옥균의 머리만 내걸려있는 사진이 나돌고 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 안내문. [사진=더밸류뉴스]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꿈은 고상했으나, '조선 집어삼키기'를 진행하고 있던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개혁을 이루려고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600년 고도 서울에는 이처럼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역사를 간직한 터가 곳곳에 있다. 


tvn@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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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6-20 15: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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