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비극적 권력 교체기, 한 청년은 책을 불태우고 길 위로 나섰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문학을 남기고, 시대를 증언했다. 신간 <영원한 청년 김시습>은 우리가 교과서 속에서 ‘절의의 인물’로만 기억해온 김시습을,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다시 불러낸다.
최근 단종의 비극을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주목받으면서, 그 시대를 관통했던 또 다른 인물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는 단순한 방외인이 아니었다.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고, 충남 공주 동학사에서 단종의 초혼제를 지낸 인물이었다. 권력에 침묵하지 않았고, 기억해야 할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저자는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국의 사찰과 사당, 시비, 초상화를 직접 답사해 기록했다. 독자들은 김시습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종의 ‘지적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사진=한걸음더]
이 책은 그런 김시습의 삶을 출생에서 죽음까지 연대기적으로 따라간다. 세 살에 시를 짓고 다섯 살에 사서삼경을 읽던 천재 소년이 어떻게 시대의 균열 속에서 ‘길 위의 인간’으로 변모했는지, 그 궤적을 촘촘히 복원한다.
특히 계유정난 이후 그의 선택은 인상적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스스로 책을 불태운 뒤, 세상과 결별하듯 전국을 유람한다. 이는 단순한 방랑이 아니라 ‘현장을 통한 사유’였다. 조선 팔도를 직접 걸으며 백성의 삶을 목격하고, 역사와 신화를 체득하며,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빚어냈다.
책은 이 대목에서 김시습을 새롭게 규정한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행가’였다. 오늘날의 여행이 소비라면, 그의 여행은 기록이자 성찰이었다. 북쪽 신의주에서 남해안까지 국토를 종횡하며 남긴 시문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시대를 해석한 텍스트였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의 문학적 성취다.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통해 우리 문학사 최초의 소설을 남긴 인물이다. 이 작품은 귀신, 용궁, 염라대왕 등 설화적 요소를 활용하면서도,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입 같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는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시도는 당대 기준으로는 혁신이었다. 책은 이러한 문학적 실험이 그의 여행과 사유에서 비롯됐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영원한 청년 김시습>의 또 다른 강점은 ‘현장성’이다. 저자는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국의 사찰과 사당, 시비, 초상화를 직접 답사해 기록했다. 부여 무량사를 비롯해 전국 13곳의 사당, 11곳의 시비, 6종의 초상화 위치와 현재 모습이 사진과 함께 담겼다. 독자는 단순히 글로 읽는 것을 넘어, 김시습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종의 ‘지적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김시습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청년’이라는 점이다. 권력에 절망했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제도 밖으로 밀려났지만 사유와 창작으로 시대를 응시했던 삶. 그는 스스로를 ‘몽사노(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불렀지만, 책은 그를 ‘끝내 늙지 않은 청년’으로 다시 세운다.
결국 이 책은 한 인물의 전기가 아니라,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시습의 길 위에서, 독자는 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은이 소종섭|한걸음더 펴냄|224쪽|17,000원
◆ 저자 소개: 소종섭
1966년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태어났다. 시사저널과 아시아경제에서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현재 아시아경제 정치부 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유튜브 채널 ‘소종섭의 시사쇼’를 진행하고 있다. 2011년 사단법인 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를 창립해 회장을 맡고 있으며, 지금까지 60차례에 걸쳐 ‘김시습 답사’를 진행했다. 유튜브 채널 ‘소종섭의 상식학교’도 운영 중이다. 저서로는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부여의 마을이야기> <한국의 혼맥> <정두언, 못다 이룬 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