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은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해상운송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돌발 상황으로 해운이 봉쇄될 경우, 한국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22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3 세미나실에서 열린 ‘우리나라 해상주권 확보 방안 마련 국회세미나’.
박정석 한국해운협회 회장 등 해운산업 및 정부 관계자들은 세미나에서 국가 전략상선대 구축을 통한 해상안보 확립 방안을 논의했다. 전략상선대란 국가 비상사태나 전쟁 시 군수품과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정부가 특별히 관리하고 지원하는 민간 선박 부대를 말한다.
박정석(오른쪽 네 번째) 한국해운협회 회장이 지난 22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린 '우리나라 해상주권 확보 방안 마련 국회세미나'를 진행하기에 앞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 LNG선 1척만 멈춰도 서울 시민 절반 전력 차질…전략상선대 구축 필요
첫 번째 발표에 나선 김경훈 한국해운협회 이사는 K-전략상선대 도입 필요성과 구체적 추진 방안을 제시했다.
김 이사는 "한국해운협회가 지난 5월부터 12월까지 전략상선대 도입을 주제로 한 연구를 진행했다"며,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성이 커질수록 전략상선대의 필요성도 비례해 높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해운협회는 해상운송이 하루만 봉쇄될 경우 발생하는 경제적 피해를 5조5000억원으로 추산했다. LNG 운반선 1척이 입항하지 못하면 약 240만 가구가 한 달간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된다. 또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1척이 입항하지 못할 경우 국내 하루 석유 소비량의 약 75%가 부족해진다.
해외에서는 위기 상황에 대비해 전략상선대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은 MSC, MSP, SCF를 축으로 한 3축 해운 전략을 통해 국가 차원의 전략상선대를 상시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매년 민간과 정부, 군대가 합동하여 물자 수송을 훈련한다.
해운협회는 "해양수산개발원(KMI), 한국해양진흥공사 등과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총 200척 규모의 전략상선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벌크선 59척, 유조선 47척, 컨테이너선 50척, 자동차운반선 9척, 가스운반선 33척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200척 목표 달성을 위한 세부적인 로드맵도 제시했다. 우선 내년에는 기존 필수선박 88척에 일반선박 12척을 추가 지정해 전략상선대 규모를 100척으로 확대하고 이후 2040년까지 선박 100척을 추가로 건조한다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 범정부 차원의 전략상선대 건조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 이사는 "중국 조선산업의 급성장 속에서 국내 LNG선 경쟁력을 강화하고, 높은 선가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중견 조선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 이사는 발표 마무리에서 전략상선대 구축을 위해 기존 법 개정보다는 별도의 신규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신규법을 제정할 경우 건조부터 운영, 유사시 활용까지 전 주기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며 “기존 법 개정은 신속한 입법이 가능하지만 포괄적인 제도 마련에는 한계가 있어 신규 법 제정이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정부와 해운업계 관계자들이 지난 22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 조선업 파이 독식하는 중국…'한국형 SHIPS' 마련 시급해
두번째 발표자로는 유진호 한국선급 미래전략팀 팀장이 나왔다.
유 팀장은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 해운 업계의 현실을 짚었다. 한국 해운은 보유한 선박들이 해외로 매각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또 한국의 해운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지만 한국의 대표 해운인 HMM과 글로벌 상위 컨테이너사인 선복량 갭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운 선사들의 신조 발주와 선박 보유량도 전반적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영국의 조선·해운 전문 분석기관 클락슨(Clarksons)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별 선박 보유량 비율은 2015년 3.1%에서 2025년 10월 기준 2.7%로 하락했다. 반면 중국은 같은 기간 7.3%에서 14.2%로 상승하며 조선업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유 팀장은 “제가 군대에 입대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의 조선은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지만, 20년이 흐른 지금은 전 세계 선박의 절반을 중국이 찍어낸다”며 “현재 중국 조선소가 전세계 수주 물량의 66%를 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거로 제시된 PPT 자료는 다소 충격이었다. 중국의 조선은 LNG 선종을 제외하고 전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단일 국가의 조선이 6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한 것은 125년 전 영국 이후 중국이 처음이다. 한국과 일본 조선 산업의 전성기 때도 ‘마의 60%’를 넘진 못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조선 지배력은 앞으로도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과 일본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선·해운 산업 재건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조선업 붕괴를 국가 안보 약화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하고, 공화·민주 양당을 막론하고 조선·해운 산업 재건에 나서고 있다.
이를 위해 약 28조 원 규모의 재원을 확보해 전략상선대 구축을 추진하는 한편, 조선·해운을 전략산업으로 규정하는 ‘SHIPS 법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공급망 안보 차원의 입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역시 2021년 이후 자국 해운 산업 보호를 위해 적극적인 정책 지원에 나서고 있다. 세계 1·2위급 조선소인 이마바리조선소와 JMU(Japan Marine United)의 합병을 승인한 데 이어, 약 10조 원 규모의 조선업 재건 기금을 조성해 해운 산업 회복을 지원하고 있다.
끝으로 유 팀장은 미·일의 해사 안보 입법을 벤치마킹한 ‘한국형 SHIPS 법안’ 제정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어 해양안보기금 조성을 위해 선수금환급보증(RG) 공제조합 신설을 주문하며, 기업·정부·지자체가 참여하는 전방위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전략상선대' 국가적 차원 육성 필요…구체적 사항은 추가적인 정책 검토해야
주제 발표가 끝난 뒤 김인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해서 전략상선대 도입을 둘러싼 토론이 이어졌다.
패널 토론에서는 전략상선대를 단순한 해운 정책이 아닌 국가 안보·공급망 인프라로 인식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패널들은 "미·중 패권 경쟁과 자원 무기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적선대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며, "민간에만 맡기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국가 차원의 육성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전략상선대 도입을 위해서는 해운·조선·항만·금융을 아우르는 통합 패키지 접근과 함께, 신규 입법을 통한 안정적 재원 조달과 운용 체계 구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김승룡 해양수산부 팀장은 “선박 규모와 재원 부담, 기존 국가필수선박 제도와의 관계 설정 등은 향후 추가적인 정책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과제로 제시했다.
김인현(왼쪽 두 번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지난 22일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주제 발표 이후 사회자를 맡아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